조선 8도 상인들이 와글와글~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약재를 편히 사고팔 수 있도록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약령시장을 여는 것을 윤허(허락)하노라!”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의 통치 시절(1658)에 내려진 결정이다. 이를 계기로 경상감영북문 근처의 뜰에는 봄, 가을마다 한 달간 약령시가 열리게 되었다. 각종 약재를 교환하거나 사고파는 시장인 약령시의 설립을 허가함으로써 대구에는 조선 최대의 약재시장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경상도에 속해 있던 의성, 영천, 합천, 봉화, 영양, 안동, 상주 등은 예로부터 좋은 한약 재료가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또 대구는 낙동강과 금호강에 접해 있어 약재 등 각종 상품을 배로 수송하기가 편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도 대구 약령시의 발전을 도왔다. 대동법(백성들이 세금으로 내던 공물인 지방 특산물을 쌀로 대신한 제도)이 실시되고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인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는 등 상업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덕분에 대구에서 거래되는 약재의 양이 빠르게 늘어났고, 대구 약령시도 조선 최대의 약재시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약령시가 열리는 기간이면 경상감영 주변은 조선 8도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붐볐고, 약령시 주변에 있는 객주(식당 겸 숙박 시설)도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조선 최대 규모인 대구 약령시의 명성은 국경 너머 중국까지 알려졌다. 인삼 등 조선이 자랑하는 약재를 구입하려는 중국 상인들까지 대구를 찾았고, 약령시에서 거래된

물건이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으니, 말하자면 약재를 거래하는 ‘글로벌 시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여러 지방이나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 이런저런 정보도 주고받게 되므로 대구가 약재뿐만 아니라 정보의 교류가 이뤄지는 도시가 된 것은 물론이다.


 

1908년 대구 약령시장이 남성로로 자리를 옮긴 후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는 약령시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일제의 거래 제약 조치로 수난을 겪은것인데, 대구의 약재 상인들은 이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인내하며 전국 최고 약령시장의 전통을 지켜냈다. 약령시장 상인 중에는 장사로 모은 돈을 독립자금에 보탠 사람들도 있었다.

 

대구 약령시의 유명세는 지금도 여전하다. 2001년 한국기네스위원회는 300년 역사를 훌쩍 넘긴 대구 약령시장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로 인증했다. 또 2004년에는 정부가 한방 관련 분야 최초로 한방특구로 지정하는 경사도 따랐다. 오늘날에도 한약상이 즐비한 남성로 거리에선 매년 5월 ‘대구 약령시 한방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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