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은 달랐으나 조선인으로 생을 마치다


 

 

우록동에 정착한 일본인 장수 사야가(김충선)

1794년(정조 18)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우록동에 녹동서원이 들어섰다. 김충선이라는 사람을 추모하는 서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김충선이 원래는 일본 출신의 장수였다는 사실이다. 서원이란 곳은 훌륭한 유학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우는 건데 어떻게 이런 일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 침략군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던 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의 우선봉장이 사야가라는 장수였는데, 어릴 때부터 일본에 유학을 전해준 조선의 문화를 흠모했던 그였기에 일본의 조선 침략이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사야가는 조선에 도착한 후 자신의 신념에 따랐다. 뜻을 같이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한 것이다. 이후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그에게 조선의 왕 선조는 직접 새 이름을 내려주며 공로를 치하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사야가가 아닌 김충선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김충선은 대구 우록동에 정착했다. 그 후로도 그는 여러 번 장수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의 북쪽 국경을 지키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에 맞

서 조선을 지키고자 앞장서서 싸웠다.

 

그 후 김충선은 1642년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우록동 주민에게 유학을 보급하는 일에 전념했다. 무사로 태어나 선비로 생을 마감한 김충선을 위해 조선의 유학자들은 출신 국적을 따지지 않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녹동서원은 그런 마음으로 세워진 곳이다.

 

 

 


 

 

명나라 출신 계산동 주민, 두사충

임진왜란이 일어나 위기에 빠진 조선이 원군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이여송에게 5만여 지원군을 주어 조선으로 파견한다. 이여송의 휘하 장수 가운데 두사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맡은 주 임무는 지형을 잘 살펴서 진지를 설치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두사충이 대구에 처음 발을 내딛은 것은 남쪽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과 명나라의 군대가 연합작전을 벌였을 때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그는 풍수지리에 밝은

눈으로 대구의 지리를 살폈을 터이다. 아마도 그때 대구의 산과 강, 들판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구라는 곳, 사람이 살기에 참 좋은 땅이로구나!’

 

임진왜란 동안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 진린을 도와 조선의 승리에 힘을 보탰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남기로 결심하자 그의 공적을 인정한 조선

정부도 대구에서 가장 좋은 땅을 내주며 두사충의 정착을 지원했다.

 

그 후 10년도 되지 않아 1601년 그 자리 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두사충은 새로이 계산동에 집을 짓고 이사해 거기에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집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지금도 계산동에는 뽕나무골목이라고 부르는 장소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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