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국보, 보물로 지정된 대구의 문화재


 

 

대구에는 2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하나는 한국의 서원 9개에 포함되어 있는 도 동서원이다. 또 하나는 세계기록유산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다. 세계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서적, 문서, 편지 같은 역사 기록을 세계유산으로 정하는 것인데, 2017년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애국운동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빌린 국채(나랏빚)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정부의 힘만으로 는 일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웠다. 이대로 가면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07년 2월 대구에 있는 출판사인 광문사를 경영하던 김광제, 서상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국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서상돈이 이런 제안을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백성들이 돈을 모아서라도 국채를 갚아야 합니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했으면 합니다. 단연(담배를 끊는 것)해서 모은 돈으로 국 채 갚는 운동을 벌여 봅시다.” 

 

이들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 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나랏돈으로는 해결할 도 리가 없으므로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이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제안하는 글을 실었다. 이들은 동시에 대구에서 담배 끊는 모 임인 단연회를 설립하여 모금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 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보 상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서울에선 국채보상기성회라는 조직 이 만들어졌다. 곧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금에 참여했다. 상인, 노동자, 농민, 부녀자, 군인 등이 참여하는 범국민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당황한 일본은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국채보 상운동을 이끌던 대한매일신보사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8년 일본은 이 신문사 경 영자가 모금액 가운데 일부를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거짓 죄를 만들어 구속하였다. 신 문사 경영자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국채보상운동 열기 는 가라앉고 말았다. 

비록 바라던 목표를 다 이루진 못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랏 빚을 갚기 위해 벌인 자랑스러운 애국운동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는 이 위대한 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딘 명예로운 도시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선언문, 회의록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과 이 운동의 기록물들이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연대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세계적 모범 사례라고 판단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Copyright ⓒ Daegu Metropolitan Office of Educ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