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보물이 가득! 경북의 박물관


 

경상북도는 대한민국 여러 지방 가운데 문화재가 많은 고장 중 하나다. 신라와 가야 의 역사가 깃든 지역이고, 또 조선시대에 경상북도에서 유교문화가 발전한 것이 큰 이유 이다. 

 

경상북도에 있는 국가 지정 국보는 52점, 보물은 260점이나 된다. 이 중 가장 많은 문 화재를 보유한 도시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이다. 그다음은 조선시대에 유교문화가 발 전했던 도시인 안동이다. 

 

경주에는 많은 국보, 보물 등을 소장하고 있는 큰 박물관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다. 이곳엔 신라역사관 등 5개의 상설전시장이 있는데, 꼼꼼하게 유물을 살펴보려면 하 루가 부족할 정도이다.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를 방문해 소장 유물 중 국보·보물을 검색하면 38개의 문화재가 나온다. 이 중에서 5개의 문화재를 구경해 보자.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문화재로 지정된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종이다.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 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여 771년 그의 아들인 혜공왕 때 완성하였다. 그래서 종 이름에 성덕대왕 이름이 붙었다. 높이가 365.8cm 인 종의 꼭대기 에는 용뉴(종 꼭대기 부분의 장식)와 음통이 있다. 종 표면에는 당초무늬, 비천상, 연꽃 문양 등이 양각되어 있다. 화려한 장식과 우아한 형태,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종소리를 내는 종으로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금관 중에서 화려함이 가장 빛나는 금관이다. 높이 32.5cm의 금관으로, 머리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 ‘山’ 자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두 줄로 있는 형태이다.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렸다. 1973년 경 주 제155호 고분에서 발굴된 것인데, 발굴 때 천마도(하늘을 나는 말의 그림)가 함께 나 와서 이 무덤의 이름을 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허리띠(국보 제190호 )

​천마총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된 것이다. 허리띠 길이는 125cm, 드리개 길이는 73.5cm이다. 얇은 금으로 만든 과판(띠의 겉에 달아서 꾸미는 낱낱의 쇠붙이) 44개, 띠 고리와 띠고리 끝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소에 찼던 허리띠가 아니라, 천마총에 묻힌 왕 또는 귀족의 장례식에 맞춰 무덤에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275호)

​말을 탄 무사 모양의 토기로, 고대 금관가야 지방인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토된 것이 다. 높이 23.2cm로 말의 등에는 뿔 모양의 2개 잔이 좌우 대칭으로 있다. 말의 몸통에 는 갑옷이 입혀져 있다. 말 위엔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무사가 앉아 있는데, 오른손에 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다. 세부 묘사가 매우 빼어난 문화재이다.

 

 

서수 모양 주전자(보물 제636호)

​경주시에 있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주전자이다. 서수는 복을 가져다주는 상서 로운 동물을 가리킨다. 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형상을 한 동물이 굽다리 위에 올려져 있다. 몸통 속은 비어 있고, 등에는 깔때기 모양의 주입구가 있다.

 

 


국보 중엔 건축물, 조각품이 많다. 그렇지만 역사적 가치가 큰 그림, 문서, 책이 국보 로 지정된 경우도 많다. 그중 경상북도에 있는 국보 3개를 구경해 보자.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경상북도 영주시의 소수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유학을 보급한 고려 시대 후 기의 학자 안향의 초상화이다. 고려시대 초상화의 화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 료이다.

 

 

징비록(국보 제132호)​

​조선 중기의 문신인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군사, 외교 분야에서 헌신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류 성룡이 조선에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전쟁 시작 때 부터 끝날 때까지 있었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장양수 홍패(국보 제181호)​

​홍패란 국가에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발급한 합격 증명서이다.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이 문서는 고려 희종 1년(1205)에 과거에 합격한 장양수에게 내린 홍패이다. 가 로 93.5cm, 세로 45.2cm로 황색 마지 두루마리에 쓰여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홍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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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 어느 논에서 한 농부가 포클레인으로 논 에 박혀 있는 큰 돌을 캐내는 공사를 벌였다. 농부는 캐낸 돌을 논두렁에 그냥 두었 다. 그 사이 비가 몇 번 내려 돌에 붙어있던 흙들이 씻겨 내려가면서 돌에 새겨진 한 자가 드러났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 우연히 돌에 새겨진 한자를 발견해 면사무소에 연락하였고, 면사무소에선 경상북도 도청에 연락해 전문가들이 와서 돌을 조사했다. 바로 울진 봉평신라비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글씨는 비석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 수는 400자 정도였다. 내용은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갈 무렵 주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신라에서 6부 회의 를 열고 저항운동을 진압한 후에 이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신라가 경주 동북 방면 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석으로, 법흥왕 시대인 524년경에 세워진 비석이었다. 학자 들은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신라의 상황과 여러 제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길이가 204cm, 아래 폭 54.5cm인 이 비석은 오랫동안 논에 방치되어 일부분이 파손된 상태지만 역사적으로 가 치가 큰 것이어서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울진 군에 이 비석 의 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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