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때 학생들은 6년 과정의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남학생은 고등보통학교(5년제), 여학생은 여자고등보통학교(3~4년제)에 진학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의 남자 중등교육기관(중・ 고등학교)으로 계성학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 대구농업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교남학교(현 대륜중・ 고) 등이 있었다. 여학교로는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경북여고)와 신명여학교(현 신명고), 대구공립고등여학교(현 대구일중) 등이 있었다.
외교권을 강탈한 1905년의 을사늑약 체결 후 일본은 조선의 교육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일본인 교사가 부임하고 일본어는 필수 과목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학교 교육을 통한 식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전까지 외국어 과목이던 일본어는 ‘국어’로, 원래 ‘국어’였던 우리말 과목은 ‘조선어’가 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는 조선의 교육, 학교, 학생이 가장 혹독하게 일본에게 통제당한 시기였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려는 교육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련 속에서도 항일운동에 적극 뛰어든 이들도 많았으니, 대구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일본의 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여러학교에서 학생들의 독립운동조직이 결성되었다.

[ K학생의 일기 중에서 ]
1937년 5월 14일
조회가 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지금부터 대구 신사를 달성공원이라 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공원이기에 모든 사람의 놀이터였지만 앞으로 그 주변은 모두 다 신사의 영내이니 놀이터로 생각지 않도록 삼가라.”는 훈화가 있었습니다..
1937년 6월 11일
방과 후 강당에 집합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시작부터 앉아서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었습니다.
1.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도 가능하면 상용하라. 학교에서는 물론이다.(…)
2. 국방에 대비하기 위해 우표를 국내에서 팔고 있는데 아직 다 팔리지 않는다고 하니 본교 학생도 마음이 있는 학생은 사무실에서 사라.
[ A학생의 일기 중에서 ]
1934년 3월 10일
오늘은 육군기념일이기 때문에 열병, 분열식을 거행하기 위해 8시 40분까지 학교에 모였다. 열병 때에 정렬을 하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때 벌써 힘이 절반 이상 빠져버렸다. 분열식 때에 보조는 맞았지만 열병 때에 너무 힘을 주었기 때문에 목이 아파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신사 참배와 시가행진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1934년 6월 2일
방과 후 대기실에서 강연이 있었다. 교장 선생이 ‘첫째는 칙어*, 둘째는 교기, 셋째는 학생들의 생명’이라고 하셨다. 나는 생명이 중요한가, 칙어나 교기가 중요한가 생각했다. 생명은 한 번 없으면 돈을 몇 억엔 내도 또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
(*칙어: 일본 국왕이 선포한 교육칙어)

일제강점기 때 학교 교육을 받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학생은 선택받은 계층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적이고 차별적인 교육에 맞서 많은 학생이 특권과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3·1 독립만세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조선의 학생들이 주도한 운동은 많다. 그 흐름 속에는 대구 학생들의 노력도 함께였으니,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계성학교의 독립만세운동과 혜성단 활동
대구의 3・ 1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하루 전인 3월 7일 밤, 계성학교교사와 학생들은 다음날 있을 만세운동을 위해 학교 건물(현재의 아담스관) 지하에 모여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 이들은 3월 8~10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부 교사와 다수의 학생 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계성학교의 항일독립운동은 4월에도 이어졌다. 17일 몇몇 학생이 혜성단을 결성하는데, 이는 대중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국내외에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던 항일 조직이었다. 만주까지 조직원을 파견하려 계획했을 정도로 그들은 의욕적이었다. 1919년 4월은 3 ・ 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일본 경찰이 항일운동을 매우 강경하게 탄압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항일 조직을 만든 것은, 학생들에게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안타깝게도 혜성단은 결성 한 달 만에 조직이 발각되었고, 조직을 이끌던 주요 학생들은 검거되었다. 이 일로 9명의 계성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이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았다.
대구고보 학생들의 동맹휴학 항일운동
대구고보(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는 1919년 계성학교와 더불어 대구 지역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9년 3・8 독립만세운동 때도 많은 학생이 참여했다. 그 후 1926년 3월에는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의 발언에 반발해 그의 퇴직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으로 맞섰다가 오히려 학생 15명이 퇴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일제의 교육정책에 맞선 등교와 수업 거부, 교내 농성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좀 더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1927년 신우동맹이라는 비밀 학생조직을 만들어 동맹휴학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1928년 일본에 발각되며 관련 학생 105명이 체포되었고, 당시 재판에 회부된 29명 가운데 24명이 실형을 선고받는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도 나섰다!
대구사범학교는 교사 양성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사범학교는 서울·평양·대구 3곳에만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문예부, 사회과학연구회, 다혁당 같은 모임들을 만들어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키웠는데, 조선의 역사・문학 관련 책들을 읽거나 외부 인사를 초청해 독립군의 활약을 전해 듣는 식이었다. 문예부에서 학생들의 글을 모아 펴낸 「반딧불」 이라는 책에는 일제의 패망을 바라는 시 작품이 실린 적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학생 활동은 1941년 일본 경찰이 항일 조직 관련 학생들을 무더기로 검거함으로써 타격을 받게 된다. 2년 후 최종 판결에서 35명에게 실형이 선고되었고,그중 5명은 감옥에서 순국했다.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의 태극단 활동
1942년 5월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 학생 이상호, 김상길, 서상교 등은 비밀 항일운동 조직인 태극단을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정한다.
• 군사학 연구에 더욱 힘쓴다.
• 재정 면에서는 우선 각자가 부담하고 애국 유지 선배들의 후원을 얻는다.
• 타 학교와 타 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투쟁을 계속하되, 형편에 따라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투쟁을 계속한다.
이들이 태극단을 조직한 것은 계속되는 일본의 폭정과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거하기 위해서였다(일본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조선인 학생은 성적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태극단 학생들은 일본군 입대를 반대하는 유인물 등을 배포하거나 동지들을 포섭하며 무장 투쟁까지 계획했다. 그러나 1943년에 발각되어 26명 단원 전원이 체포됐고, 단장 이상호를 비롯한 6명 학생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불과 사흘 만에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남쪽으로 계속 후퇴하던 대한민국 정부는 7월 16일 대구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경상감영 건물이 정부 청사가 되고, 경상북도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숙소 겸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대구 시내 각 학교를 비롯한 주요 시설도 군용으로 바뀌었다.
치열한 전투와 희생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낸 국군은 경상북도 칠곡의 다부동전투를 비롯한 영천 신령전투, 포항 형산강전투 등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쟁의 흐름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정규 군인뿐만 아니라 학업을 중단한 채 전장으로 뛰어든 학생들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학도병 또는 학도의용군이라고 불린 그들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시 대구는 학도병을 모집하고 전선으로 내보내던 전투원 보급 기지였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2만 7700여 명의 학도병 가운데 사망자는 2,573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지역에서 참여한 약 2000여 명 중에도 19개교의 학생 148명이 전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경북중(현 경북고) 53명, 대구농림학교(대구농업마이스터고) 30명, 대구상업중(상원고) 21명, 대구공업중(대구공고) 12명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있었는데, 전사한 대구상업중 학생 중에는 야구부에서 활동했던 선수들도 있었다. 이들의 희생이 특히 컸던 지역이 포항이었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전투에선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학도병 모집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집중되었다. 1951년 정부는 학도병의 학교 복귀 지시 담화를 발표했다. 이때 대구에는 다른 지역에서 부모와 함께 피난 온 학생들이 많았다. 대구는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교 시설을 군대에 넘겨주어 교육시설이 크게 부족했다.
하지만 피난 학생들의 교육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경상북도교육청은 대구에 피난 온 서울시 교육 관계자들이 대구에 피난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51년 9월 20일 대구 향교 근처에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13개 학급에 학생 수는 약 2,830명이었다.
피난학교의 환경은 나빴다. 판자로 지어진 건물인데다 교실은 맨바닥이었다. 긴 널빤지를 무릎에 얹어 책상으로 써야만 했다. 교과서를 만들 종이가 부족해 UN에서 종이를 지원받았다. 그래도 교과서가 부족해서 학생들은 옆자리의 친구와 같이 교과서를 보며 수업을 받았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배움의 열기는 뜨거웠다. 전쟁 중에도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학생들의 삶에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뉴욕타임스》에 실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끝이 났고, 대구연합중학교는 1954년 3월 31일 문을 닫았다. 대구의 피난학교는 어려움 속에도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을 멈추지 않은 대한민국 교육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