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청춘의 궐기, 2・28 민주운동

 

광복 이후 1948년 8월 정식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이승만과 그가 이끄는 자유당이었다. 그들이 10년 넘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정부의 부패로 국민들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1960년 3월 15일 펼쳐질 제4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의 운명도 불확실했다. 경쟁자였던 해공 신익희 후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확실시됐지만, 그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상황은 불안하기만 했다.

 

결국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려 정부와 여당은 갖가지 부정 한 방법을 동원한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신천)에서 열릴 야당(민주당) 후보의 선거 유세에 군중이 모

이는 것이 두려워 불법 조치를 내린 것이다. 그날 공공기관과 주요 기업 사람들의 출근은 물론 학생들의 등교까지 지시하는 조치였는데,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등교 지시는 2월 25일 경북고등학교에서 종례 시간에 학생들에게 통보되었다.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지시 이유가 선거 유세 참여를 막기 위해서란 걸 알고 격분하였고, 대구고와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등 다른 학교 학생들도 일요일 등교 지시에 분노하였다.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학교별로 학생위원회를 열어 일요일 등교 지시를 철회할 것을 학교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월 27일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인 이대우의 집에서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 대표가 참가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학생들은 28일 오후 1시를 기해 정부의 비민주적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 교정에서는 학생 대표가 결의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의 결의문은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비슷한 시각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시위를 결의하는 행사가 열렸고, 학생들은 이어 교문을 나와 대구 시내로 향했다.

 

경북고, 사대부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대구고,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대구공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의 인파로 도심이 들끓었다. 시위대는 곧 일요일 등교 지시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행진을 시작했다.

 

반월당에 모인 학생들이 향한 방향은 경북도청(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쪽이었다.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구둣발로 학생들을 제지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나,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박수로 격려했고, 일부는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2월 28일 대구에서 터진 시위의 함성은 몇몇 도시로 이어졌다.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를 3・ 15 의거라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서울에선 경찰의 폭력 진압과 실탄 사격으로 186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4・ 19의 외침이 폭발하게 된다. 결국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며칠 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4월 26일)을 이끌어내고야 마는데, 1960년 봄에 일어난 이 민주화운동을 4・ 19 혁명이라고 한다. 

 

대구에서 일어난 2・ 28 민주운동은 4・ 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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