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북도는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자랑스러운 명성을 가진 땅이다.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운동, 일제강점기 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난 까닭이다. 경북에서 일어난 주요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자.
1894년 안동, 최초의 의병운동이 일어나다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았다. 가장 위협적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이 땅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 나가던 그들은 조선 정부를 위협하려고 1894년 7월 군대를 동원해 경복궁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분노한 민중의 저항이 있었다. 그해 7월에서 9월 동안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운동이 대표적이다. 갑오년(1894)에 일어난 의병이어서 이들을 갑오의병이라고 부른다. 그해 안동과 문경 등에서 모여든 의병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다. 의병 부대는 9월 상주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갑오의병들의 항거는 조선 말기 일본에 맞선 최초의 의병운동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5~1896년 다시 들고 일어나 싸우다
1895년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친일파 내각은 같은 해에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했다. 이런 현실에 분노한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곳곳에서 대규모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을미년(1895)에 일어나 을미의병이라 불리는 이들은 전국 곳곳에서 친일 반민족 벼슬아치들을 처단하는 한편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경상북도의 여러 곳에서도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지역이 안동, 김천, 성주, 영해 등이었다.

1907년, 허위와 신돌석이 이끈 의병부대
1905년 일본은 조선의 고종황제를 협박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1907년엔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여기에 분노한 의병운동이 다시 조선 곳곳에서 일어났다. 1895년에 을미의병으로 활동한 구미 출신의 허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의병 부대를 조직한 그는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연합 부대를 편성해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보낸다. 마침내 13개 도에서 모인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했고, 허위의 선발부대는 비록 패했으나 1908년 1월에 서울 동대문 밖까지 진격하는 기세를 보였다. 1907년에 활약한 경북 출신 의병 지도자에는 문경 출신의 이강년, 영덕 출신의 신돌석도 있었다.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은 경상북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일본과 여러 번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신돌석 부대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연이어 일본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1910년 조선을 완전히 병합한 일본은 감시와 단속을 더욱 강화한다. 국내에서 독립 운동을 펼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이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 북쪽 국경 너머에 있는 만주로 건너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쳤다. 경상북도에서도 많은 이들이 만주로 향했는데, 안동의 이상룡은 1911년에 일가친척을 이끌고 만주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에서 1918년까지 그는 서간도 조선 동포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우며 신흥강습소라는 학교를 세워 조선인 청년 교육에 노력한다 (훗날 독립군 양성의 핵심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한 곳이다).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추대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만주에서 숨을 거둔다. 또 다른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김동삼이 있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상룡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1919년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을 지휘했으나, 1931년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해방 전인 1937년 서대문형무소 에서 순국했다.
만주에서 활동한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여성도 있다. 먼저, 영양군에서 태어난 남자현을 들 수 있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그는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돌며 독립의지를 드높이는 한편 체포된 독립운동가 석방, 국제사회를 향한 조선 독립 호소에 앞장섰다. 남자현의 활동은 이러한 평화적 수단에만 그치지 않았다. 1924년 경성(서울)의 사이토 총독, 1933년 만주 주재 일본대사 암살 계획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두 계획 모두 실패했고, 일본 대사 암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 어 혹독한 고문과 감옥 생활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는 결국 이때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자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북 출신 여성도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식량과 옷 등을 마련하느라 애를 쓴 허은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구미 출신으로 1915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그는 1922년 이병화와 결혼하며 이상룡의 손자며느리가 된다. 허은은 1932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을 돕는일에 헌신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대구와 경상북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안동 지역에서는 1920년대에 청년회가 조직되어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이 활발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1927), 신사참배 거부운동(1939) 등이 펼쳐졌다. 또 안동농림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 학생들의 항일운동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이 조선 학생들에게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자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일본 군대에 끌려가 죽기보다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게 된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1943년에 조직한 비밀 단체가 조선회복연구단이다.
조선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의 경찰서와 헌병대를 기습·점령하고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 지역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이 1945년 2월 초 관련자들을 검거함에 따라 64명의 학생 이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 끝에 한 학생이 사망하고, 남은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다음날 풀려날 수 있었다.
감옥에서 석방되며 “아! 독립이다, 독립이다! 마침내 우리의 나라를 찾았다!”고 외쳤다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 이들의 항일 투쟁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51년간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 독립운동사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경상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학생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기념관으로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한 후 2014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 승격되었다. 기념관이 위치한 내앞마을은 1907년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펼친 곳이다. 경북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많이 갖추고 있어 독립운동사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구미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왕산은 허위의 호로서, 이 기념관은 구미 출신 유학자이자 의병 지도자였던 허위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에 개관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전시실과 시청각실, 어린이도서관도 갖추고 있다. 또 허위 선생의 생가 터에는 동상과 추모관 등이 있는 허위선생기념공원이 있다.

문경 운강이강년기념관
문경시 가은읍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 의병 지도자인 운강 이강년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의 생을 추모하는 곳이다. 기념관 마당에는 이강년의 동상과 그의 활동을 기록한 비석이 있으며, 기념관 내에는 선생의 생애를 보여 주는 여러자료와 그를 추모하는 사당(의충사)이 있다.

경북의 다양한 독립운동 유적지들
영덕군 영해면에는 3・1의거탑이 있다(사진). 1919년 3월 18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다. 또 영덕군 축산면에 가면 이곳 출신 의병대장인 신돌석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영양군에는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인 남자현의 생가가 있다. 이 외에도 경북에는 의성군의 3· 1운동 경북시발지기념공원, 청송군의 항일의병기념관, 그리고 영주시 풍기읍의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