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이문열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이문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은 서울 출생이지만, 원래 그의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의 두들마을이었다. 그는 유년기를 고향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신문 기자 생활을 하며 소설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1980년대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그는 『사람의 아들』을 비롯해 『황제를 위하여』, 『우리 기쁜 젊은 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의 히트작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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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김주영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김주영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1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1971년 소설가로 정식 데뷔했다.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천둥소리』를 비롯해 『객주』, 『화척』, 『홍어』 등이 유명하다. 대하소설 『객주』는 조선 말기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왕이나 저명한 인물들 중심이던 역사소설에 새바람을 불어 넣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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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박목월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박목월

1916년 경주에서 태어난 박목월(1916~1978)은 1939년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청록집』으로 유명해졌다. 자연을 소재로 한 이 아름다운 서정시들의 묶음은 평론가들로 하여금 세 사람을 ‘청록파’로 부르게 했다. 시집에 실린 박목월의 작품 중에는 「나그네」가 특히 유명하다. 박목월은 아름다운 동시와 수필도 많이 썼다. 그 역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 한국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 경주 동리목월문학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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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김동리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김동리

김동리(1913~1995)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훗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1934)되며 문학가로 등단한 그는 1947년 첫 소설집 『무녀도』를 발표하며 일약 한국 문단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단편 소설 「무녀도」, 「황토기」,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의 업적 중엔 빼어난 작가들을 많이 발굴하고 양성한 것도 있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와 『월간문학』이란 잡지를 발행하면서 많은 신인 작가들을 양성, 발굴하였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한국 문학을 빛내는 작가가 되었다. ​ 경주 동리목월문학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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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권정생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권정생

아름다운 동화들을 선물하고 간 권정생1969년 『강아지똥』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동화가 세상에 나왔다. 안동에 사는 권정생(1937~2007)이라는 무명작가의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무시받던 강아지똥이 어느 날 발견한 민들레꽃에게서 자신이 그 예쁜 노란 꽃을 피우게 할 거름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건 세상에 하찮은 건 없으며, 저마다 가치가 있다는 주제를 쉽고 꾸밈없는 글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조선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이 되고 1946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안 가 터진 한국전쟁과 가난으로 가족과 헤어져 대구 등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나무장수, 가게 점원 등을 하며 살았다. 가난과 고생 탓에 얻은 병 속에서 그를 지켜준 힘은 기독교 신앙과 독서, 글쓰기였다. 『강아지똥』의 성공과 함께 권정생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흙집에 살면서 교회 종지기로, 동화작가로 사는 삶은 바뀌지 않았다. 작품의 성공은 계속되어 1984년 발표한 『몽실언니』가 다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드라마화되는 인기를 얻었다. 권정생은 자신의 작품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어린이를 위한 단체를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어린이를 위한 여러 사업을 하고 있다. 작가 권정생과 그가 쓴 동화 『강아지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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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이육사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이육사 시인 이육사(1904~1944)의 작품 중에서는 「청포도」가 특히 유명하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구절로 시작해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으로 끝이 난다. 청포도를 제재로 풍요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노래했다고 해석되는 시이다.1904년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었다. 크면서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고, 영천에 있던 백학서원과 대구의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몇 년간은 대구에서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며 작품을 발표해 나간다.이육사는 시인이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투사이기도 했다. 그는 1927년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벌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최초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육사라는 이름은 이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온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항일운동으로 1944년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항일 투쟁에 평생을 바친 탓에 이육사가 남긴 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청포도」를 비롯해 「광야」, 「절정」과 같은 시들은 일제강점기 때 탄생한 시 가운데 매우 빼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육사 탄생 100주년이 되던 2004년 이육사문학관이 시인의 고향에서 문을 열었으며, 이 외에도 안동에선 해마다 이육사시문학상 시상식, 전국육사백일장 등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안동 이육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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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프라이싱거
엠마 프라이싱거

1961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수녀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당시 29세였던 그 수녀의 이름은 엠마 프라이싱거였다.  프라이싱거 수녀는 이때부터 50년이 넘도록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한센인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가톨릭피부과의원을 세워 의술을 베풀었다. 프라이싱거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한센포럼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프라이싱거 수녀에게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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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맥타가트
아서 맥타가트

아서 맥타가트는 1953년 미국 국무부 산하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76년 국무부 에서 퇴직한 그는 영남대학교 영어영문 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97년 퇴임할 때까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월 30만원 안팎의 최소 생활비로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과 연금을 모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버스비까지 아끼려고 먼 거리를 걸어다 니며 모은 돈은 제자 200여 명의 장학 금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영남대학 인문관 1층 로비에는 그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흉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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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브리지 존슨
우드브리지 존슨

젊은 선교사로 한국을 찾은 미국인 우드브리지 존슨은 1899년 대구 약령 시장 근처에 제중원을 설립했다. ‘많은 사람들을 구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인 제중원은 대구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의료 기관이었다. 1899년 개원한 이 후 제중원은 1901년까지 약 2000여 명의 환자를 보살폈으며, 환자가 더 늘어남에 따라 1903년 대구시 중구 동산동으로 이전했다.  제중원이 동산기 독병원(현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의 전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11년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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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에 가톨릭을 전파한 김보록 로베르 신부
대구 지역에 가톨릭을 전파한 김보록 로베르 신부

두사충이 정착한 동네인 계산동에 1899년 대구 최초의 성당이 들어섰다.프랑스 출신의 로베르 신부(한국 이름 김보록)가 세운 계산성당이었다.  불운하게도, 애초에 한국식 목조 건물로 지어진 성당은 지은지 2년쯤 되어 화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로 로베르 신부가 낙담해 의욕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 성당을 다시 세웁시다. 돌과 벽돌로 더 튼튼하게 지읍시다.” 신부의 말에 교인들 역시 “저희 신자들도 건축비를 보태겠습니다.”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새로 짓는 성당의 설계와 공사 감독은 로베르 신부가 직접 맡았고, 공사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기술자들도 참여했다.  마침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가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 완공되었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축성식은 다음해인 1903년에 열렸는데, 조선 각지의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대구 지역 일반 주민들까지도 구경을 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는 마치 흥겨운 잔칫날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대구는 조선에서 비교적 일찍 천주교가 보급된 도시였다. 1911년 대구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한 후 계산성당은 경상도 천주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100년을 훌쩍 넘긴 성당 건물은 현재 국가 지정 사적지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성당의 정원에 가면 로베르 신부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흉상 조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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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깊은 집』을 쓴 작가 김원일
『마당 깊은 집』을 쓴 작가 김원일

소설가 김원일(1942~ )은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를 다룬 빼어난 소설을 여럿 썼다. 그중 하나가 1988년에 발표한, 대구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인 『마당 깊은 집』이다.   194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원일은 소년 시절에 대구로 이사 와 대구시 중구 장관 동에 있는 마당 깊은 집에서 살았다. 실제로 소설의 중심 공간이 된 곳이다.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몇 년 뒤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그 덕에 소 설의 배경인 대구의 거리, 대구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원일은 『마당 깊은 집』 발표 후에도 『마음의 감옥』 등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여 한국을 대 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이 집에 모여 살게 된 여섯 가구, 22명의 인물 들에 얽힌 사건들을 소년 길남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소설이다. 아버지 없이 어머 니 밑에서 누나, 두 명의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길남은 돈을 벌기 위해 신문팔이에 나 선다.  또 한 명의 주요 인물인 길남의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며 아이 넷을 키우느라 헌 신하는 여성이다.  소설에는 대구의 여러 거리와 시장이 등장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1954년 대구의 풍 경이 눈앞에 절로 그려진다. 대구 도심의 교동시장과 종로거리는 물론, 진골목(마당 깊 은 집이 있던 골목)의 모습도 눈에 잡힐 듯 생생하다.  현재 종로거리에는 신문팔이에 나 선 길남이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품 등이 있다. 계산성당 근 처에는 이 소설을 기념하는 공간인 마당깊은집문학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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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문화관 내의 음악감상실 녹향
향촌문화관 내의 음악감상실 녹향

음악의 도시 대구엔 음악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대구에 대한민국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1946년에 문을 연 ‘녹향’은 이창수라는 음악애 호가가 향촌동 자택의 지하실에 마련한 공간이었다. 축음기와 함께 보유한 클래식 음반 의 수는 500여 장.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예술가들이 대구로 몰려들자 녹향은 대한민국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 감상 외에 시 낭독회, 출판 기념회 같은 문화행사도 자 주 열렸다. 1958년 녹향은 향촌동에서 남일동으로 이전했다. 시간이 흘러 고전음악감상실이 늘 어나고 서양 팝송의 인기가 치솟자 녹향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경영난으로 이사만 10 여 차례나 했음에도 꾸준히 영업을 이어갔다.  2011년 이창수 사장이 작고한 뒤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하던 녹향은 2014년 들어 마침내 폐업을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대구의 문화예술인과 시민이 뜻을 모아 ‘녹향 살리기 운동’을 벌였는데, 여기에 감동한 이창수의 유족이 녹향의 자산인 2000여 장의 음반과 축음기 등을 대구시 중구 에 기증했다. 덕분에 중구 향촌문화관 지하 1층에서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한 녹향을 다 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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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이인성

1912년 대구 남성로에서 태어난 이인성(1912~1950)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보통학교를 마친 후 상급학교 진학 대신 화가 서동진 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웠다.  17세 때 소파 방정환이 주최한 세 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천재 소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듬해에는 당시 최고의 경연대회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명성을 굳혔고, 지역 화가들의 모임인 ‘향토회’에 가입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이들의 도움으로 이인성은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 후 조선과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는 화가로 성장하여 〈경주의 산곡에서〉, 〈가을 어느 날〉, 〈해당화〉 같은 향토색 짙은 명작을 발표했다.  어떤 미술평론가는 그를 ‘조선의 보물 과 같은 화가’라고 평가하였다.  유럽의 회화 사조인 인상파・야수파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수채화와 유화 분야에서 자신만의 개성 있고 과감한 표현법으로 명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이인성양화연구소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쓰는 등 대구의 서양화 보급과 발전에도 큰 공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총기 오발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그림은 여전히 눈부시다. 이인성을 기념하여 매년 대구에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인 1명의 화가를 선정하여 이인성미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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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박태준

1922년 경상남도 마산에 있는 창신중학교에는 대구 출신의 음악 교사 박태준 (1900~1986)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동료 교사인 이은상에게 대구 계성학교 에 다니던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청라언덕 이야기부터 학창 시절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학생 이야기까지.  “박 선생은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시는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듣던 이은상의 말에 박태준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대구가 그립고, 나 홀로 좋아했던 그 여학생이 생각나기도 하고….” 노래 하나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빼어난 문학가이기도 했던 이은상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노랫말을 지었다. 여기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탄생한 가곡이 바 로 〈동무 생각〉이다. 그중 1절의 가사를 음미해 보자.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청라언덕은 박태준이 다녔던 계성학교 건너편에 있는 언덕 이름으로,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의미한다. 학창 시절 박태준은 청라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등교했는데 백합 같은 한 여학생을 마주치곤 했던 곳이 그 언덕길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가곡 〈동무 생각〉은 한국음악사 최초의 가곡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가 낳은 음악가 박태준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 창신학교와 모교인 대 구 계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많은 가곡과 동요를 작곡했다. “뜸북 뜸북 뜸북새”로 시 작하는 국민 동요 <오빠 생각>도 그의 작품이다.  그 후 박태준은 미국에서 합창 지휘를 공부한 후 돌아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하며 국내의 합창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구에서 1938년 창단한 지역 최초의 일 반 합창단(대구합창협회)을 지휘한 인물도 그였다. 현재 청라언덕에는 청소년 시절의 순수한 그리움을 아름답게 표현한 〈동무 생각〉 노래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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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기단부 석축
불국사 기단부 석축

경주에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먼저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인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땅 위에 건축으로 풀어 낸 절이라 할 수 있다.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만들고 여기에 전각과 탑을 세웠는데, 특히 자연석과 다듬은 돌 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축대는 우리 전통건축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영역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과 석가탑 등이 있는 구역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등이 있는 구역으로 나뉜다. 국보 제23호 청운교 와 백운교는 정교하고도 화려하며, 석가탑(국보 제21호)은 완벽한 균형미와 장중한 아 름다움을 지녔다. 또 다보탑(국보 제20호)은 나무를 조각하듯 돌을 화려하고도 세밀하 게 다듬은 솜씨가 걸출하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같은 해에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했는데, 그의 사후 혜공왕 10년 (774)에 완공되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석굴이다. 긴 네모꼴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 축 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 등 조각의 아름다움도 탁월하며, 시설 훼손을 막기 위한 공기순환장치 등 과학적인 설계도 빼어나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 되어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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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의 고장 경상북도
인재의 고장 경상북도

1751년 조선의 선비인 이중환은 조선 땅 곳곳을 답사한 후 지리책인 『택리지』를 썼다. 『택리지』 경상도 편에는 경상도의 역사와 여러 지방 지리 정보가 실려 있는데, 경상도를 소개하는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경상도에서 장군, 재상, 훌륭한 선비, 공을 세웠거나 절개를 지킨 사람, 불도 등에 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경상도를 인재의 곳간이라 한다.”   경상도가 배출한 인재의 역사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신라 사람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 시절에 이미 명성을 얻은 인재였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왕조가 들어선 후 많은 경주 출신 인재들이 고려 조정에서 활약했다.  고려 중엽 이후에는 유학자 안향, 역 사서를 편찬한 김부식과 일연, 정치 지도자인 정몽주,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같은 역사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에서 빼어난 유학자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유명 한 사람이 이황이었다. 이황을 배출한 안동 그리고 선산, 영주 같은 지방은 조선시대에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또 조선시대에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에 오른 사람이 무척 많았다.   종교 지도자도 많이 배출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 조선시대 말기 만민평등사상을 주 창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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