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경상북도의 역사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경상북도의 역사

  경상북도는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자랑스러운 명성을 가진 땅이다.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운동, 일제강점기 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난  까닭이다. 경북에서 일어난 주요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자.  1894년 안동, 최초의 의병운동이 일어나다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았다. 가장 위협적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이 땅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 나가던 그들은 조선 정부를 위협하려고 1894년 7월 군대를 동원해 경복궁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분노한 민중의 저항이 있었다. 그해 7월에서 9월 동안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운동이 대표적이다. 갑오년(1894)에 일어난 의병이어서 이들을 갑오의병이라고 부른다. 그해 안동과 문경 등에서 모여든 의병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다. 의병 부대는 9월 상주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갑오의병들의 항거는 조선 말기 일본에 맞선 최초의 의병운동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5~1896년 다시 들고 일어나 싸우다1895년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친일파 내각은 같은 해에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했다. 이런 현실에 분노한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곳곳에서 대규모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을미년(1895)에 일어나 을미의병이라 불리는 이들은 전국 곳곳에서 친일 반민족 벼슬아치들을 처단하는 한편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경상북도의 여러 곳에서도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지역이 안동, 김천, 성주, 영해 등이었다. ​​  1907년, 허위와 신돌석이 이끈 의병부대1905년 일본은 조선의 고종황제를 협박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1907년엔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여기에 분노한 의병운동이 다시 조선 곳곳에서 일어났다. 1895년에 을미의병으로 활동한 구미 출신의 허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의병 부대를 조직한 그는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연합 부대를 편성해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보낸다. 마침내 13개 도에서 모인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했고, 허위의 선발부대는 비록 패했으나 1908년 1월에 서울 동대문 밖까지 진격하는 기세를 보였다. 1907년에 활약한 경북 출신 의병 지도자에는 문경 출신의 이강년, 영덕 출신의 신돌석도 있었다.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은 경상북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일본과 여러 번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신돌석 부대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연이어 일본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1910년 조선을 완전히 병합한 일본은 감시와 단속을 더욱 강화한다. 국내에서 독립 운동을 펼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이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 북쪽 국경 너머에 있는 만주로 건너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쳤다. 경상북도에서도 많은 이들이 만주로 향했는데, 안동의 이상룡은 1911년에 일가친척을 이끌고 만주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에서 1918년까지 그는 서간도 조선 동포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우며 신흥강습소라는 학교를 세워 조선인 청년 교육에 노력한다 (훗날 독립군 양성의 핵심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한 곳이다).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추대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만주에서 숨을 거둔다. 또 다른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김동삼이 있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상룡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1919년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을 지휘했으나, 1931년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해방 전인 1937년 서대문형무소 에서 순국했다. 만주에서 활동한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여성도 있다. 먼저, 영양군에서 태어난 남자현을 들 수 있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그는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돌며 독립의지를 드높이는 한편 체포된 독립운동가 석방, 국제사회를 향한 조선 독립 호소에 앞장섰다. 남자현의 활동은 이러한 평화적 수단에만 그치지 않았다. 1924년 경성(서울)의 사이토 총독, 1933년 만주 주재 일본대사 암살 계획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두 계획 모두 실패했고, 일본 대사 암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 어 혹독한 고문과 감옥 생활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는 결국 이때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자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북 출신 여성도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식량과 옷 등을 마련하느라 애를 쓴 허은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구미 출신으로 1915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그는 1922년 이병화와 결혼하며 이상룡의 손자며느리가 된다. 허은은 1932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을 돕는일에 헌신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대구와 경상북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안동 지역에서는 1920년대에 청년회가 조직되어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이 활발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1927), 신사참배 거부운동(1939) 등이 펼쳐졌다. 또 안동농림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 학생들의 항일운동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이 조선 학생들에게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자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일본 군대에 끌려가 죽기보다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게 된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1943년에 조직한 비밀 단체가 조선회복연구단이다. 조선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의 경찰서와 헌병대를 기습·점령하고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 지역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이 1945년 2월 초 관련자들을 검거함에 따라 64명의 학생 이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 끝에 한 학생이 사망하고, 남은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다음날 풀려날 수 있었다. 감옥에서 석방되며 “아! 독립이다, 독립이다! 마침내 우리의 나라를 찾았다!”고 외쳤다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 이들의 항일 투쟁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51년간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 독립운동사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경상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학생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기념관으로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한 후 2014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 승격되었다. 기념관이 위치한 내앞마을은 1907년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펼친 곳이다. 경북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많이 갖추고 있어 독립운동사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구미 왕산허위선생기념관왕산은 허위의 호로서, 이 기념관은 구미 출신 유학자이자 의병 지도자였던 허위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에 개관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전시실과 시청각실, 어린이도서관도 갖추고 있다. 또 허위 선생의 생가 터에는 동상과 추모관 등이 있는 허위선생기념공원이 있다.​  문경 운강이강년기념관문경시 가은읍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 의병 지도자인 운강 이강년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의 생을 추모하는 곳이다. 기념관 마당에는 이강년의 동상과 그의 활동을 기록한 비석이 있으며, 기념관 내에는 선생의 생애를 보여 주는 여러자료와 그를 추모하는 사당(의충사)이 있다.​  경북의 다양한 독립운동 유적지들영덕군 영해면에는 3・1의거탑이 있다(사진). 1919년 3월 18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다. 또 영덕군 축산면에 가면 이곳 출신 의병대장인 신돌석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영양군에는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인 남자현의 생가가 있다. 이 외에도 경북에는 의성군의 3· 1운동 경북시발지기념공원, 청송군의 항일의병기념관, 그리고 영주시 풍기읍의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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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3 ・ 1만세운동길 &  신명3 ・ 1운동기념탑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3 ・ 1만세운동길 & 신명3 ・ 1운동기념탑

   3 ・ 1만세운동길 & 신명3 ・ 1운동기념탑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때 학생들이 집결지로 이동하던 길 중 하나가 바로 3 ・ 1만세운동길이다. 돌계단을 오르면 청라언덕이 나오는데, 만세운동 당시에는 계단길 근처의 신명여학교에서 교사를 비롯해 50여 명의 이 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이 참여했다. 신명3 ・ 1운동기념탑은 그때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건립된 기념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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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2000년초에 대구상원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현재의 위치(대구상원고등학교 후문부근)에 세운 것이다. 탑과 함께 기념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매년 5월 이곳에선 태극단 학생들의 후배인 상원고 학생들이 구국에 앞장선 선배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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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이 탑은 두류공원과 사대부고 교정 두 곳에 있다. “눈서리가 땅을 덮어도 송죽은 푸름을 바꾸지 않고 총칼이 목숨을 겨눠도 지사는 뜻을 굽히지 않나니”로 시작하는 두류공원 기념탑 건립문을 찬찬히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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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2 ・ 28민주운동기념탑 &  경북고등학교역사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2 ・ 28민주운동기념탑 & 경북고등학교역사관

   2 ・ 28민주운동기념탑 & 경북고등학교역사관대구에는 2 ・ 28 민주운동을 기념하는 탑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61년 과거 명덕로터리에 세워졌고, 지금은 두류공원에 있는 기념탑이다. 이 외에도 경북고, 대구고, 상원고, 대구공고에 2 ・ 28기념탑이 건립되어 있다. 한편 경북고등학교역사관에서도 이 학교의 역사와 함께 2 ・ 28 민주운동 자료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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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교육박물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교육박물관

   대구교육박물관북구 산격동에 있는 대구교육박물관은 교육도시 대구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대구의 교육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하는 곳으로 근대부터 현대까지 대구 교육의 발자취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7개의 전시실과 5개의 체험실을 갖추고 있다. 교육전시관에 있는 2· 28전시관에 가면 2· 28 결의문, 관련 신문기사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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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청춘의 궐기, 2・28 민주운동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청춘의 궐기, 2・28 민주운동

 광복 이후 1948년 8월 정식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이승만과 그가 이끄는 자유당이었다. 그들이 10년 넘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정부의 부패로 국민들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1960년 3월 15일 펼쳐질 제4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의 운명도 불확실했다. 경쟁자였던 해공 신익희 후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확실시됐지만, 그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상황은 불안하기만 했다. 결국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려 정부와 여당은 갖가지 부정 한 방법을 동원한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신천)에서 열릴 야당(민주당) 후보의 선거 유세에 군중이 모이는 것이 두려워 불법 조치를 내린 것이다. 그날 공공기관과 주요 기업 사람들의 출근은 물론 학생들의 등교까지 지시하는 조치였는데,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등교 지시는 2월 25일 경북고등학교에서 종례 시간에 학생들에게 통보되었다.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지시 이유가 선거 유세 참여를 막기 위해서란 걸 알고 격분하였고, 대구고와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등 다른 학교 학생들도 일요일 등교 지시에 분노하였다.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학교별로 학생위원회를 열어 일요일 등교 지시를 철회할 것을 학교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월 27일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인 이대우의 집에서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 대표가 참가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학생들은 28일 오후 1시를 기해 정부의 비민주적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 교정에서는 학생 대표가 결의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의 결의문은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비슷한 시각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시위를 결의하는 행사가 열렸고, 학생들은 이어 교문을 나와 대구 시내로 향했다. 경북고, 사대부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대구고,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대구공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의 인파로 도심이 들끓었다. 시위대는 곧 일요일 등교 지시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행진을 시작했다. 반월당에 모인 학생들이 향한 방향은 경북도청(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쪽이었다.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구둣발로 학생들을 제지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나,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박수로 격려했고, 일부는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2월 28일 대구에서 터진 시위의 함성은 몇몇 도시로 이어졌다.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를 3・ 15 의거라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서울에선 경찰의 폭력 진압과 실탄 사격으로 186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4・ 19의 외침이 폭발하게 된다. 결국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며칠 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4월 26일)을 이끌어내고야 마는데, 1960년 봄에 일어난 이 민주화운동을 4・ 19 혁명이라고 한다.  대구에서 일어난 2・ 28 민주운동은 4・ 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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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대구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때 학생들은 6년 과정의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남학생은 고등보통학교(5년제), 여학생은 여자고등보통학교(3~4년제)에 진학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의 남자 중등교육기관(중・ 고등학교)으로 계성학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 대구농업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교남학교(현 대륜중・ 고) 등이 있었다. 여학교로는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경북여고)와 신명여학교(현 신명고), 대구공립고등여학교(현 대구일중) 등이 있었다. 외교권을 강탈한 1905년의 을사늑약 체결 후 일본은 조선의 교육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일본인 교사가 부임하고 일본어는 필수 과목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학교 교육을 통한 식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전까지 외국어 과목이던 일본어는 ‘국어’로, 원래 ‘국어’였던 우리말 과목은 ‘조선어’가 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는 조선의 교육, 학교, 학생이 가장 혹독하게 일본에게 통제당한 시기였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려는 교육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련 속에서도 항일운동에 적극 뛰어든 이들도 많았으니, 대구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일본의 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여러학교에서 학생들의 독립운동조직이 결성되었다. ​  [ K학생의 일기 중에서 ]1937년 5월 14일조회가 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지금부터 대구 신사를 달성공원이라 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공원이기에 모든 사람의 놀이터였지만 앞으로 그 주변은 모두 다 신사의 영내이니 놀이터로 생각지 않도록 삼가라.”는 훈화가 있었습니다.. 1937년 6월 11일방과 후 강당에 집합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시작부터 앉아서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었습니다. 1.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도 가능하면 상용하라. 학교에서는 물론이다.(…) 2. 국방에 대비하기 위해 우표를 국내에서 팔고 있는데 아직 다 팔리지 않는다고 하니 본교 학생도 마음이 있는 학생은 사무실에서 사라.   [ A학생의 일기 중에서 ]​ 1934년 3월 10일오늘은 육군기념일이기 때문에 열병, 분열식을 거행하기 위해 8시 40분까지 학교에 모였다. 열병 때에 정렬을 하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때 벌써 힘이 절반 이상 빠져버렸다. 분열식 때에 보조는 맞았지만 열병 때에 너무 힘을 주었기 때문에 목이 아파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신사 참배와 시가행진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1934년 6월 2일방과 후 대기실에서 강연이 있었다. 교장 선생이 ‘첫째는 칙어*, 둘째는 교기, 셋째는 학생들의 생명’이라고 하셨다. 나는 생명이 중요한가, 칙어나 교기가 중요한가 생각했다. 생명은 한 번 없으면 돈을 몇 억엔 내도 또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칙어: 일본 국왕이 선포한 교육칙어)   일제강점기 때 학교 교육을 받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학생은 선택받은 계층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적이고 차별적인 교육에 맞서 많은 학생이 특권과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3·1 독립만세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조선의 학생들이 주도한 운동은 많다. 그 흐름 속에는 대구 학생들의 노력도 함께였으니,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계성학교의 독립만세운동과 혜성단 활동대구의 3・ 1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하루 전인 3월 7일 밤, 계성학교교사와 학생들은 다음날 있을 만세운동을 위해 학교 건물(현재의 아담스관) 지하에 모여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 이들은 3월 8~10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부 교사와 다수의 학생 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계성학교의 항일독립운동은 4월에도 이어졌다. 17일 몇몇 학생이 혜성단을 결성하는데, 이는 대중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국내외에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던 항일 조직이었다. 만주까지 조직원을 파견하려 계획했을 정도로 그들은 의욕적이었다. 1919년 4월은 3 ・ 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일본 경찰이 항일운동을 매우 강경하게 탄압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항일 조직을 만든 것은, 학생들에게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안타깝게도 혜성단은 결성 한 달 만에 조직이 발각되었고, 조직을 이끌던 주요 학생들은 검거되었다. 이 일로 9명의 계성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이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았다.대구고보 학생들의 동맹휴학 항일운동대구고보(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는 1919년 계성학교와 더불어 대구 지역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9년 3・8 독립만세운동 때도 많은 학생이 참여했다. 그 후 1926년 3월에는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의 발언에 반발해 그의 퇴직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으로 맞섰다가 오히려 학생 15명이 퇴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일제의 교육정책에 맞선 등교와 수업 거부, 교내 농성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좀 더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1927년 신우동맹이라는 비밀 학생조직을 만들어 동맹휴학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1928년 일본에 발각되며 관련 학생 105명이 체포되었고, 당시 재판에 회부된 29명 가운데 24명이 실형을 선고받는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도 나섰다!대구사범학교는 교사 양성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사범학교는 서울·평양·대구 3곳에만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문예부, 사회과학연구회, 다혁당 같은 모임들을 만들어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키웠는데, 조선의 역사・문학 관련 책들을 읽거나 외부 인사를 초청해 독립군의 활약을 전해 듣는 식이었다. 문예부에서 학생들의 글을 모아 펴낸 「반딧불」 이라는 책에는 일제의 패망을 바라는 시 작품이 실린 적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학생 활동은 1941년 일본 경찰이 항일 조직 관련 학생들을 무더기로 검거함으로써 타격을 받게 된다. 2년 후 최종 판결에서 35명에게 실형이 선고되었고,그중 5명은 감옥에서 순국했다.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의 태극단 활동1942년 5월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 학생 이상호, 김상길, 서상교 등은 비밀 항일운동 조직인 태극단을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정한다. • 군사학 연구에 더욱 힘쓴다.• 재정 면에서는 우선 각자가 부담하고 애국 유지 선배들의 후원을 얻는다.• 타 학교와 타 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투쟁을 계속하되, 형편에 따라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투쟁을 계속한다. 이들이 태극단을 조직한 것은 계속되는 일본의 폭정과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거하기 위해서였다(일본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조선인 학생은 성적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태극단 학생들은 일본군 입대를 반대하는 유인물 등을 배포하거나 동지들을 포섭하며 무장 투쟁까지 계획했다. 그러나 1943년에 발각되어 26명 단원 전원이 체포됐고, 단장 이상호를 비롯한 6명 학생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불과 사흘 만에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남쪽으로 계속 후퇴하던 대한민국 정부는 7월 16일 대구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경상감영 건물이 정부 청사가 되고, 경상북도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숙소 겸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대구 시내 각 학교를 비롯한 주요 시설도 군용으로 바뀌었다.​  치열한 전투와 희생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낸 국군은 경상북도 칠곡의 다부동전투를 비롯한 영천 신령전투, 포항 형산강전투 등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쟁의 흐름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정규 군인뿐만 아니라 학업을 중단한 채 전장으로 뛰어든 학생들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학도병 또는 학도의용군이라고 불린 그들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시 대구는 학도병을 모집하고 전선으로 내보내던 전투원 보급 기지였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2만 7700여 명의 학도병 가운데 사망자는 2,573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지역에서 참여한 약 2000여 명 중에도 19개교의 학생 148명이 전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경북중(현 경북고) 53명, 대구농림학교(대구농업마이스터고) 30명, 대구상업중(상원고) 21명, 대구공업중(대구공고) 12명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있었는데, 전사한 대구상업중 학생 중에는 야구부에서 활동했던 선수들도 있었다. 이들의 희생이 특히 컸던 지역이 포항이었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전투에선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학도병 모집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집중되었다. 1951년 정부는 학도병의 학교 복귀 지시 담화를 발표했다. 이때 대구에는 다른 지역에서 부모와 함께 피난 온 학생들이 많았다. 대구는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교 시설을 군대에 넘겨주어 교육시설이 크게 부족했다.​  하지만 피난 학생들의 교육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경상북도교육청은 대구에 피난 온 서울시 교육 관계자들이 대구에 피난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51년 9월 20일 대구 향교 근처에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13개 학급에 학생 수는 약 2,830명이었다.​  피난학교의 환경은 나빴다. 판자로 지어진 건물인데다 교실은 맨바닥이었다. 긴 널빤지를 무릎에 얹어 책상으로 써야만 했다. 교과서를 만들 종이가 부족해 UN에서 종이를 지원받았다. 그래도 교과서가 부족해서 학생들은 옆자리의 친구와 같이 교과서를 보며 수업을 받았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배움의 열기는 뜨거웠다. 전쟁 중에도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학생들의 삶에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뉴욕타임스》에 실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끝이 났고, 대구연합중학교는 1954년 3월 31일 문을 닫았다. 대구의 피난학교는 어려움 속에도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을 멈추지 않은 대한민국 교육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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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의 보물, 울릉도와 독도
푸른 동해의 보물, 울릉도와 독도

3무 5다의 섬예로부터 울릉도를 ‘3무 5다의 섬’이라고 했다. 3개가 없고(無) 5개가 많다(多)는 뜻이다. 없는 것은 도둑, 공해, 뱀이고 많은 건 물, 미인, 돌, 바람, 향나무이다. 결국 ‘3무 5다’는 살기 좋고 깨끗한 울릉도의 자연환경을 잘 설명하는 표현이다. 울릉도에 돌이 많은 것은 신생대 제3기에서 4기에 걸쳐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조면암 및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기 때문이다.우산국이 있었던 섬울릉도에는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에 관한 첫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을수 있다. 512년 하슬라 지방(오늘날 강원도 강릉 지방)을 다스리던 신라 장수 이사부는 동해에 있는 우산국(울릉도의 옛 이름)을 신라 땅으로 만드는 일을 계획했다. 그는 육지를 떠나기 전 나무로 사나운 얼굴의 맹수 조각을 만들어 우산국으로 접근했다. 이어 우산국 근처에 도착한 이사부는 이곳 사람들에게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섬에 풀어버리겠다.”고 위협을 한다. 이 말에 우산국 사람들은 항복을 했고, 이로써 우산국과 그 주변 지역(독도)은 신라의 영토로 들어오게 된다.천연기념물이 무척 많은 섬울릉도는 육지에선 보기 힘든 여러 자연자원과 문화자원을 가진 섬이다. 울릉도의 천연기념물에는 향나무 자생지, 섬잣나무 군락지, 섬댕강나무 군락지, 울릉국화 군락지,​성인봉 원시림 등이 있다. 울릉도에 속한 독도의 천연보호구역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 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울릉군 사동리 해변에는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의 서식지가 있다. 이 외에 울릉도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의 집인 통나무로 벽을 짜맞춘 투막집과 소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이은 너와집은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이다. 성인봉과 나리분지가 있는 섬울릉도의 최고봉인 성인봉은 높이가 987m나 된다. 성인봉의 해발 600m 위치에 있는 원시림은 섬피나무, 너도밤나무, 섬고로쇠나무 등의 희귀 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평야지대를 이루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최대 강설량을 기록했을 때는 하루에 151cm(1955년 1월 20일 기록)나 쌓이기도 했다. 울릉도에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겨울에 차가운 북쪽 공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바다 위를 지나면서 눈구름을 자주 만들기 때문이다.​​  신라 장군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독도는 우리 대한민국의 섬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독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속하게 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부터로 알려진다. 당시 하슬라 지방의 군주였던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부터 독도가 우리의 고유 영토로 존재해 온 것이다.왕건에게 방물을 바친 우산국 사람들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 재위 13년째 되던 930년, 우산국 사람들은 왕건에게 방물(임금에게 바치던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울릉도와 독도 지역은 고려 정부로부터 우산국 또는 우릉성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했다. 육지와 지속적인 문물 교류가 계속되었고, 울릉도·독도 지역은 여전히 우리의 영토로 존재했다.1882년, 주민들의 울릉도 이주를 허가하다조선 정부는 울릉도·독도 지역에 섬을 비우는 정책을 실시했다. 여진족과 왜구의 위협이 사라져 동해안 방어선으로서 울릉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육지에 사는 조선 어부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며 고기잡이와 해산물 채취를 했다. 1882년 조선 정부가 섬 거주를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 울릉도로 본격적인 주민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1900년 대한제국은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울도군을 설치한다는 칙령 제41호를 발표하였다. 독도가 우리의 땅임을 명확하게 공표한 것이다.​ ​952년 해양주권 선언, 독도는 우리 땅1945년 광복 후 울릉도와 독도는 한반도 부속도서로서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1946년 1월 29일 일본 정부에 하달된 연합군 최고사령관 훈령 677호 3항에는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지역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포함되어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 1월 18일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공표하여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이고, 그 주변 12해리가 대한민국 영해임을 분명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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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신천 이야기 둘, 신천둔치는 꽃과 나무의 천국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신천 이야기 둘, 신천둔치는 꽃과 나무의 천국

  신천 이야기 둘, 신천둔치는 꽃과 나무의 천국신천의 다리 중 하나인 대봉교 근처에 둔치공원이 있다. 물과 조화를 이룬 다양한 꽃과 나무를 관찰하기 좋은 곳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 따라 많은 나무가 꽃을 피운다. 봄소식을 전하는 홍매화부터 살구나무꽃, 산수유꽃, 개나리, 박태기꽃, 자두나무꽃, 명자나무꽃, 벚꽃, 영산홍, 이팝나무꽃, 찔레꽃, 능소화, 무궁화 등을 볼 수 있다. 공원둔치에서 보이는 대구도시철도 3호선이 신천을 지나가는 모습도 멋진 장면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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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신천 이야기 하나, 수달을 발견하라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신천 이야기 하나, 수달을 발견하라

   신천 이야기 하나, 수달을 발견하라신천에서 처음 수달이 발견된 것은 2005년이었다. 그리고 2019년에는 대구의 하천에서 발견된 수달의 수가 총 24마리에 이르렀다(신천 8, 금호강 7, 동화천 7, 팔거천 2). 연구자들은 수달이 많이 발견되는 곳으로 팔달교-조야교 구간, 대구시 동구의 안심습지, 금호강-신천 합류부 3곳을 꼽았다. 이 연구대로라면 신천에서 수달을 발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신천과 금호강의 합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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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지방기상청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지방기상청

   대구지방기상청대구시 동구 효목동에 있으며, 시민을위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기상청 소개 동영상 시청, 일기도그리기, 관측 장비 견학, 기상캐스터 체험 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기상청 홈페이지만 잘 활용해도 기후 관련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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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대구시 중구 동인동에 있는 공원으로 빌딩 가득한 도심에서 꽃, 나무, 새소리를 친구 삼아 산책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이다. 공원 이름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기념하여 정한 것이다. 달구벌대종이 있는 마당에서는 매년 신년맞이 타종 행사가 열린다. 다양한 식물 외에 볼 것도 많고, 산책하며 위인들이 남긴 명언을 읽을 수 있는 ‘명언 순례의 오솔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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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수목원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수목원

   대구수목원대구시 달서구 대곡동에 있는 대구수목원은 꽃, 나무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체험학습 장소이다. 수목원을 방문하면 산책하며 희귀식물부터 약용식물까지 다양한 식물을 구경할수 있다. 또 수목원 안에 있는 산림문화전시관에서는 더 깊이 있는 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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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시티 대구의 어제와 오늘
그린시티 대구의 어제와 오늘

  대구는 남쪽과 북쪽이 높은 산지로, 서쪽과 동쪽은 150m 내외의 구릉지로 둘러싸인도시다. 분지 도시인 것이다. 분지 지형은 대구의 기온에 영향을 주었는데, 여름 더위도 그 영향 중 하나다. 그렇다면 대구 분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지구는 약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 이후 지질시대는 시생대·원생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의 순서로 흘러왔다. 약 1억 년 전은 중생대의 한 시기인 백악기로, 대구에 공룡이 살았던 시대다. 이때도 대구가 속한 경상도 땅은 저지대였다. 이곳을 흐르던 물줄기는 잘게 부서진 암석들과 함께 호수로 흘러 들어갔다. 작은 암석들이 호수 아래에 쌓이고 굳어지며 퇴적암이 되었다. 이후 대구에선 몇 번의 화산활동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화산암 지질인 대구 북부, 남부의 산지 지형이 형성되었고, 한편으로 퇴적암 지역은 하천에 의한 지속적인 침식작용으로 평평한 땅이 되었다. 이로써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가 형성되었다. 대구 분지는 금호강 지류인 신천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평지 이 다. 이 평지의 서부와 동부에는 낮은 구릉지가 넓게 분포했는데, 시간이 흘러 대구의 인구가 늘고 시가지가 주변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밭으로 이용되던 많은 구릉지가 주택가로 변화했다.​    예로부터 대구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산지로 둘러싸여 외적 방어에 유리했고, 다른 지역과 비교해 태풍, 홍수 피해가 덜했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흘러 농사짓기 좋았고 교통도 편리했다. 그러나 자연환경이 다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한반도는 어디나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춥지만, 대구는 유난히 여름이 더운 도시였다. 대구가 여름에 더운 것은 지형의 영향이 가장 크다. 대구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지역에서는 여름에 더운 공기가 산에 막혀 잘 빠져나가지 못한다. 또, 다른 지역보다 강수량이 적은 편이다.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건물이 많은 지역에서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높게 나타나는 열섬현상도 대구의 더위를 심화하는 데 한몫했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대구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할 때가 많았다. 1942년 8월 1일에는 무려 40˚C를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변화가 나타났다. 여름 더위를 재는 측도 중 하나인 열대야 일수가 정체·감소되는 흐름을 보인 것이다. 일 최고 기온에서도 2010년대 후반부터 다른 도시들이 대구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함에 따라 ‘여름이 가장 무더운 도시’에서는 벗어나는 추세다​    “대구가 너무 덥다 보니 시민들이 생활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나무를 많이 심으면 그래도 덜 덥지 않을까요?” 1980년대 초, 대구시청에서는 이런 논의들이 있었다. 그때부터 대구에서는 나무심기 운동과 녹지 공간 확대 작업이 시작되었고, 1996년부터는 ‘푸른 대구 가꾸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을 시작할 당시 대구시는 이런 비전을 세웠다. “대구를 세계적인 숲의도시로 만들어 보자!” 숲의 도시 만들기 사업은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대구시는 1차 사업 기간이던 2006년까지 1,093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07년부터 5년간 진행한 2차 사업에서는 1,208만 그루를, 2012년부터 2016년까지였던 3차 사업에서는 1,164만 그루를 심었다. 20년이 넘는 동안 가로수를 심고, 공원 등 녹지공간을 많이 만들고, 옥상에 정원을 만드는 사업도 추진되었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대구시가 전국에서 인구 대비 가로수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된 것이다. 2019년 대구시의 녹피율(녹지 면적/전체 면적)은 한국의 특별시·광역시 평균인 51%를 초과한 62.4% 수준까지 올랐다. 2019년 말 통계에 의하면 대구시에는 800여 개소의 도시공원이 있으며, 1인당 도시공원 면적도 6.64㎡나 된다. 이렇게 하여 ‘대프리카 대구’는 ‘그린시티 대구’로 변화하였다. 많은 나무와 숲이 있는덕분에 대구 시민의 삶의 질은 높아졌다. 여름철에는 나무 그늘 아래서 편하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아울러 초록잎 돋아나는 봄부터 울긋불긋 단풍 물드는 가을까지 아름다운 가로수의 도시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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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에 있는 산, 강, 들판 이야기
경북에 있는 산, 강, 들판 이야기

태백산맥의 중심에 우뚝 솟은 태백산한반도 산줄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태백산맥의 중심이 되는 산이 태백산이다. 태백산의 산줄기는 서남쪽 방향으로 다시 큰 산줄기를 뻗어 내리는데, 태백산맥보다 작다고 소백산맥이라 이름을 붙였다. 높이 1,567m의 태백산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태백시에 걸쳐 있다. 이 산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신성한 곳으로 여겼던 산이었다. 매년 태백산 천제단에서 고조선을 세운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중국에서 피난 온 왕의 전설이 전해 오는 주왕산청송군에 있는 높이 721m의 주왕산은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특히 3개의 아름다운 폭포를 이어 주는 산길은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주왕산이란 이름은 옛날 옛적 중국의 왕이 이곳으로 피 란을 온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신라 왕자 김주원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주왕산 기슭에 있는 호수인 주산지는 화려한 풍광이 유명하다. 여러 번 영화와 광고의 무대가 되었으며 많은 사진작가들이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신라의 명필 김생, 고려 공민왕의 이야기가 전해 오는 청량산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높이 870m의 청량산은 소금강(작은 금강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산이다.청량산 곳곳엔 많은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다. 신라 때의 명필 김생이 수련을 하였다고 전해 오는 김생굴이 있고, 고려시대 말기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피란 온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다 하여 공민왕을 모신 사당 도 있다. 조선의 유명한 유학자인 이황은 안동에서 가까운 청량산을 무척 사랑하여 자신을 ‘청량산인(청량산의 사람)’이라 불렀다.  수많은 불교 문화재가 있는 경주 남산경상북도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있는 남산은 466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산 곳곳에 불상과 탑, 절터가 많이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남산에 불교 문화재가 많은 것은 불교가 중흥한 통일신라시대에 사람들이 이곳을 부처님이 계신 신령스러운산으로 섬겼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이 남산 기슭에 있으며, 근처 지역까지 포함하면 절터만 112곳, 탑이 61기, 불상도 80개나 남아 있다. 또한 산 근처에는 신라의 왕이나 귀족이 묻혔던 무덤도 다수 남아 있다.​​    낙동강은 대구・ 경북의 역사, 문화, 경제에 큰 영향을 준 강이다. 낙동강의 이름 유래 등 낙동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525.15km낙동강의 길이는 525.15km이다. 이 긴 강이 처음 시작되는 곳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는 태백산 지역이다. 낙동강은 한강, 금강, 영산강과 더불어 한국의 4대강으로 불린다.낙동강이란 이름은 경상북도 상주시의 옛 이름 중 하나인 낙양에서 유래한다. ‘낙양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또 고대 경상도에 있었던 가야의 또 다른 이름, ‘가락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내성천, 위천, 금호강…낙동강에는 많은 지천이 있다.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내려온 낙동강은 남쪽으로 흘러 안동 부근에서 제1지류인 반변천의 물을 받아들인다. 영양군에서 발원한 반변천은 낙동강의 지천이라 하지만 길이가 약 113km나 되는 큰 강이다. 이 강은 청송군을 지나안동 부근에서 낙동강과 합쳐진다.반변천 외에도 큰 하천이 여럿 있다. 내성천은 봉화군에서 발원하여 문경 지역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위천은 군위군에서 발원하여 의성군 지역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이다. 포항에서 발원한 금호강은 대구에서 낙동강에 합쳐진다.    800리 뱃길조선시대에 대규모 물품 이동은 강이나 바다를 통해 배로 옮기는 것이 편했다. 이때 낙동강 뱃길은 대구와 경상북도의 물류에 생명줄 역할을 하였다. 낙동강 뱃길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경상남도 동래(지금의 부산)까지 약 800리(약 314km)에 달했다. 낙동강은 대구뿐만 아니라 강 주변의 안동시, 상주시, 구미시 같은 도시들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경상도의 농업 발전은 말할 것도 없다. 강 주변에 넓게 평야를 만든 것은 물론 농업용수를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구와 낙동강낙동강은 대구의 경제 발전 에도 큰 도움을 준 강이다. 오늘날 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사문진나루터는 과거 장삿배들이 활발히 오가던 교류의 통로였다. 현재 이 나루터가 있던 곳에는 그때의 역사를 기념하는 사문진역사공원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낙동강은 여전히 고마운 강이다. 낙동강의 물은 대구 시민이 마시는 상수원이다. 또 낙동강변 강정 고령보에 2012년 개관한 디아크문화관은 물의 중요성을 홍보하며 다양한 물 관련 예술품을 감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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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연귀산과 거북바위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연귀산과 거북바위

   연귀산과 거북바위(봉산동 제일중학교 본관 앞)연귀산은 대구 미술 1번지인 봉산문화거리 근처에 있다. 해발 65m 높이인데, 조선시대에는 지금보다 높았다고 한다. 근처에는 대구의 대표적인 유교문화재인 대구향교가 있는데, 조선시대에 경상감영 옆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대구 도심에서도 거북바​위를 구경할 수 있는데, 중앙로에 연귀 산 거북바위를 본뜬 조형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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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앞산전망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앞산전망대

   앞산전망대앞산은 대구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곳이다. 앞산을 이루는 봉우리 중 하나인 비파산 근처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대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향하면 팔공산이 보이고, 팔공산 좌측 방향으로는 가산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가까운 수성구 쪽에는 두리봉과 무학산이 보이고, 서쪽을 보면 와룡산이 있다. 또 시야가 맑은 날엔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금오산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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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남평 문씨 세거지 & 인흥사 터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남평 문씨 세거지 & 인흥사 터

   남평 문씨 세거지 & 인흥사 터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 온 동네를 집성촌 또는 세거지라고 한다. 비슬산에서 멀지 않은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는 대구에 있는 대표적인 집성촌 중 하나로 마을 전체가 대구시 민속문화재 제3호이다. 이곳에 있었던 인흥사는 일연스님이 1264년에 와서 머물렀던 곳인데, 지금은 탑과 우물 등만 남아 있다. 인흥사마당에 있었던 삼층석탑 2기 중 1기는경북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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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비슬산 유가사와 도성암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비슬산 유가사와 도성암

   비슬산 유가사와 도성암유가사는 용연사와 함께 비슬산을 대표하는 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절로 괘불(불교행사 때 사용하는 그림), 삼층석탑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가사의 한 암자인 도성암은 스님들의 참선 장소로 유명한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2년(827)에 도성국사가 지었다고 한다. 유가사 근처에는 비슬산자연휴양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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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팔공산 올레길 중 평광동 왕건길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팔공산 올레길 중 평광동 왕건길

  팔공산 올레길 중 평광동 왕건길올레길 4코스에 있는 평광동은 왕건이 달아나다가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동네이다. 또 평광동 입구에서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는 건물인 모영재에 이르는 길은 왕건이 도망한 길이라 ‘왕건임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평광동은 대구의 특산물인 사과를 키우는 농가가 많은 곳인데, 수령이 90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고령 사과나무가 이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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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산에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
대구의 산에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

  경치가 빼어나 이름난 산을 명산이라고 한다. 대구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에 걸쳐 있는 1,084m의 비슬산은, 고려시대의 승려인 일연 이야기와 함께 한국 최대의 참꽃군락지가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비슬산과 일연의 『삼국유사』고려와 조선시대에 비슬산은 포산이라고 불렸다. 고려시대인 1227년, 한 승려가 이 산에 왔다. 그는 얼마 전 고려의 수도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에서 열린 승려 과거에서 1등으로 합격한 일연이었다. 그가 개경을 떠나 포산에 온 이유는 불교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였다. 일연은 오랫동안 비슬산에 있는 절과 암자에 머물면서 수행을 열심히 하였다. 당시 고려의 백성은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연은 오랜 전쟁에 지친 고려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 한반도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역사부터 불교 이야기까지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진 역사책 『삼국유사』는 1281년경 완성되었다. 『삼국유사』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권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연표다. 2권은 고조선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고려 등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 나라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3권과 4권은 불교 발전에 업적을 남긴 승려와 불교 문화재 이야기, 5권은 유명한 승려들의 행적과 효자 효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봄날의 참꽃, 가을날의 갈대가 다 아름다운 비슬산비슬산에는 용연사, 유가사처럼 역사가 오래된 절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그와 함께 비슬산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해마다 봄이면 비슬산 정상을 진홍빛으로 물들이는 참꽃 군락지가 유명하다. 대구 사람들은 이곳을 ‘진분홍의 천상화원’이라고 자랑할 정도인데, 이 멋진 봄 풍경을 보기 위해 매년 약 10만 명 정도가 비슬산을 찾는다. 봄 풍경이 다가 아니다. 산기슭과 능선을 따라 억새가 물결치는 가을 비슬산의 모습도 놓칠 수 없다. 여름은 여름대로 매력적이다. 여름 비슬산의 매력은 하루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비슬산자연휴양림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해발 1,058m의 조화봉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높은 봉우리가 둘러싼 곳에 들어서 있어서,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숲속 휴식 공간이다.​     대구 학생들이 소풍을 많이 간 앞산비슬산의 산줄기가 북서쪽으로 뻗은 곳에 높이 660m의 산이 솟아 있다. 대구 사람에게 팔공산 못지않게 친근한 산인 앞산이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대구 지도에 전산(前山, 앞산)이 등장한 뒤 그대로 굳어져 쓰인다는 설과 조선시대부터 경상감영 앞쪽에 있다 하여 앞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불산이라고도 불렀다.1971년에 앞산공원이 조성되었다. 고산골, 안지랑골, 용두골 같은 경치 좋은 곳이 많아, 과거 대구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다. 지금은 앞산전망대를 비롯해 빨래터공원, 해넘이전망대, 케이블카 등이 설치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돌거북 전설이 전해 오는 연귀산대구시 중구 봉산동에 있는 대구제일중학교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바위 속 거북이 머리는 앞산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꼬리는 팔공산이 있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 바위가 있는 산이 연귀산이다. 연귀산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대구의 진산(그 고장을 지켜 준다고 믿었던 산)으로 우러러보던 산이었다. 연귀산에 있는 거북바위는 대구에 처음 도시가 형성될때 지맥(산맥의 원줄기에서 갈려 나간 줄기)이 잘 통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였던 용암산용암산은 팔공산과 금호강 사이로 뻗어 내려가는 북서-남동 방향의 산줄기 중간에 솟아 있는 높이 367.7m의 산이다. 용암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졌다는 둘레 약 1,300m의 용암산성(대구광역시기념물 제5호)이 있다. 다소 평평한 정상에 비해 동서 양쪽이 급경사를 이루는 산세인데, 이곳에 산성이 세워진 이유는 용암산이 대구에서 경산–경주–포항을 잇는 길목에 있고, 넓은 지역을 관찰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용암산성은 임진왜란 때 대구의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싸웠던 전적지이다. 성 안에는 옥천이라는 샘이 있다. 대구의 의병들이 왜군에 굳세게 저항하며 싸우자 왜군은 용암산성에 이르는 길을 막고 지구전을 벌였다. 시간이 흘러 산성에 물이 부족해지자 의병들은 물을 구하기 위해 산성 안의 땅을 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어느 순간 파내려 가던 땅 아래에서 시원한 물이 용솟음치듯이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 대구 시내를 흐르는 하천인 신천의 발원지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비슬산 지역이다. 산에서 시작된 냇물은 하류로 흘러 비슬산 근처 백록마을을 지나, 녹동서원이 있는 우록마을을 지나서 수성구 지역으로 흘러간다. 수성구 파동을 지나면서 신천은 대구의 중심 지역에 가까워진다. 신천의 다리를 통과하는 자동차와 사람의 숫자도 늘어난다. 상동교, 중동교, 대봉교, 침산교 등 신천의 다리 이름은 신천이 지나는 주변 동네 이름에서 따온 것이 많다. 칠성시장 근처인 칠성교를 지나면서 신천은 하류에 가까워진다. 몇 개의 다리를 지나친 신천의 물은 신천의 마지막 다리인 대구시 북구 침산교를 지나 금호강에 합류한다.금호강은 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산에서 발원하여 영천시, 경산시를 거쳐 대구로 흘러드는 강이다. 금호강은 신천뿐만 아니라, 팔공산에서 발원한 불로천, 대구시 서구를 흐르는 달서천 등 대구의 여러 하천 물을 받아들이며 대구의 북쪽을 지나 서쪽을 향해 흐른다. 금호강이 끝나는 지점은 대구시 달서구 성서 지역과 화원읍에 있는 달성습지이다. 이곳에서 금호강은 낙동강과 합류해 경상북도 고령군을 거쳐 경상남도 여러 지역을 적신 뒤 남해바다에서 긴 여행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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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이 품은 아름다운 산길, 여기는 올레길입니다
팔공산이 품은 아름다운 산길, 여기는 올레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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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대구와 함께해 온 산, 팔공산
오래오래 대구와 함께해 온 산, 팔공산

 높이 1,192m의 팔공산은 대구를 대표하는 산이다. 신라 사람들은 팔공산을 ‘중악’ 또는 ‘공산’이라고 불렀다. 중악이란, ‘나라(신라)의 중앙에 있는 큰 산’이라는 뜻이다. 신라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는 신이 산다고 생각하는 5개의 산을 성스럽게 여겼고, 특별히 5악이라 불렀다. 5악은 동악(지금의 경주 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태백산) 그리고 중악(팔공산)이었다. 팔공산이 중악이었다는 사실은 팔공산이 있는 대구가 신라 영토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팔공산은 웅장한 산이다.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가 날개를 펴고 있는 것처럼 하늘로 향해 있다. 신라의 법흥왕이 527년 불교를 공인한 후부터 5악 중 하나인 팔공산은 신라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팔공산 곳곳엔 신라의 번영을 빌기 위한 절이 세워졌다. 팔공산에서 꽃핀 찬란한 불교문화는 대구의 문화를 더 풍성하게 해주었다. 오늘날에도 팔공산은 대구를 대표하는 자연이요, 산이다. 그래서 대구광역시의 심벌 마크에도 팔공산이 표현되어 있다. 또 대구의 많은 학교 교가에는 ‘드높이 솟은 팔공산’, ‘팔공산 정기 어린’같이 팔공산을 표현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조선의 문학가가 노래한 공산 8경​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글을 통해서 팔공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는데, 그중 대구 출신의 문신 서거정이 표현한 공산 8경(팔공산에서 특히 경치가 아름다운 8곳)이 유명하다. 그가 선정한 8경 중 제1경은 무심봉(최고봉인 비로봉의 다른 이름)의 흰 구름이었다. 이 경치를 서거정은 ‘하늘 맞닿은 산 정상에 오르니, 발아래 두둥실 구름 떠다니네’라고 표현하였다. 나머지 7경은 다음과 같다. 제2경 제천단에 내리는 여름 소낙비(제천단은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제3경 적석성의 밝은 달(적석성은 팔공산 군위 방면에 있는 성이다.)제4경 백리령에 쌓인 눈(백리령은 가산산성에서 갓바위까지 동서로 뻗은 능선이다.)제5경 금병장의 단풍(염불적봉 아래 병풍바위의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이다.)제6경 ​​​​부도암의 폭포(부도암은 동화사에 속한 암자이다.)제7경 약사봉의 새벽별(약사봉은 갓바위가 있는 봉우리이다.)제8경 ​​동화사의 종소리(깊고 맑게 울리는 종소리는 귀를 기울이면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팔공산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 동화사 외에도 산 곳곳에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 종류도 다양하다.​ 천년의 역사를 넘긴 팔공산의 여러 절팔공산에는 493년에 세워진 동화사 외에 천년 역사를 넘긴 오래된 절이 여럿 있다. 은해사는 809년에 세워진 절로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을 대표하는 큰 절이다. 보물제1270호인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삼존불 등 수많은 문화재 말고도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된 편액을 5점이나 보유하고 있다. 파계사는 팔공산 서쪽에 있는 절로 804년에 창건되었다. 파계사라는 절 이름은 팔공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아홉 갈래의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공산 남쪽에 있는 부인사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절이다. 고려시대에 이 절에 대장경을 만들어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부인사의 대장경은 몽골의 침략 때 소실되었다. 또 부인사는 선덕여왕을 모신 숭모전을 두고 해마다 선덕여왕숭모재를 지내는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칠곡에 있는 송림사는 544년에 세워진 오래된 절이다. 이곳엔 벽돌로 만든 5층탑(보물 제189호)이 있는데, 1959년 탑 복원공사를 할 때 탑 속에서 사리를 모신 장엄구 등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영산전 & 삼존석굴은해사는 팔공산 동쪽 자락인 영천 지역에 있는 절이다. 은해사에 속한 암자인 거조암에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이 있다. 거조암의 중심 건물인 영산전은 526구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어 유명하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어진 건물로 고려말, 조선초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팔공산은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여러 지방에 뻗어 있다. 그중 하나인 경상북도 군위군에는 국보 제109호인 삼존석굴이 있다. 지상 6m 높이의 암벽을 뚫어 만든 인공석굴 안에 세 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관봉 석조여래좌상(갓바위)갓바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불상 조각은 경상북도 경산시에 속한 팔공산 지역에 있다. 해발 859m 지점에 있는 약 6m 높이의 불상으로, 머리 위엔 갓 모양의 자연석이 올려져 있다. 근엄한 얼굴이 특징인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불상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해 내려와, 요즘도 시험기간이면 합격을 비는 사람들로 불상 앞이 비좁을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팔공산에서 의병을 이끈 사명대사 유정1544년 태어난 유정은 1559년 오늘날 경상북도 김천시에 있는 직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유정은 승려들로 이루어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유정이 지휘하던 승병 부대는 한때 본부가 동화사에 있었다. 유정은 조선 정부군의 지휘자, 대구의 의병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대구를 지키는 데 힘썼다. 또 유정은 전쟁이 끝난 후인 1604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군이 끌고 간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무사히 데려오는 공로를 세웠다.  팔공산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해준 장수 신숭겸927년 팔공산에서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지휘하는 군대가 격돌했다. 후백제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왕건을 살린 것은 신숭겸과 김락 두 명의 부하 장수였다. 왕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두 장수는 고려시대에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왕건은 신숭겸을 추모하여 팔공산에 지묘사라는 절을 세워 신숭겸의 명복을 빌었다. 오늘날 팔공산에 있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는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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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경북이 배출한 유명 문학가들

 독립운동가 시인 이육사시인 이육사(1904~1944)의 작품 중에서는 「청포도」가 특히 유명하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구절로 시작해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으로 끝이 난다. 청포도를 제재로 풍요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노래했다고 해석되는 시이다.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었다. 크면서 고향에서 한학을 익  히고, 영천에 있던 백학서원과 대구의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몇 년간은  대구에서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며 작품을 발표해 나간다.  이육사는 시인이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투사이기도 했다. 그는 1927년 독  립운동가 장진홍이 벌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최초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육사라는 이름은 이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온 것이  다. 이때부터 그는 항일운동으로 1944년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항일 투쟁에 평생을 바친 탓에 이육사가 남긴 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청  포도」를 비롯해 「광야」, 「절정」과 같은 시들은 일제강점기 때 탄생한 시 가운데 매우 빼  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육사 탄생 100주년이 되던 2004년 이육사문학관  이 시인의 고향에서 문을 열었으며, 이 외에도 안동에선 해마다 이육사시문학상 시상  식, 전국육사백일장 등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아름다운 동화들을 선물하고 간 권정생1969년 『강아지똥』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동화가 세상에 나왔다. 안동에 사는 권정생  (1937~2007)이라는 무명작가의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무시받던 강아지똥이 어느 날  발견한 민들레꽃에게서 자신이 그 예쁜 노란 꽃을 피우게 할 거름이 될 수 있음을 깨닫  는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건 세상에 하찮은 건 없으며, 저마다  가치가 있다는 주제를 쉽고 꾸밈없는 글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조선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이 되고 1946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안 가 터진 한국전쟁  과 가난으로 가족과 헤어져 대구 등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나무장수, 가게 점원 등을  하며 살았다. 가난과 고생 탓에 얻은 병 속에서 그를 지켜준 힘은 기독교 신앙과 독서,  글쓰기였다. 『강아지똥』의 성공과 함께 권정생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흙집에 살면서 교  회 종지기로, 동화작가로 사는 삶은 바뀌지 않았다. 작품의 성공은 계속되어 1984년 발  표한 『몽실언니』가 다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드라마화되는 인기를 얻었다.  권정생은 자신의 작품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어린이를 위한 단체를 만들어 달라는 유  언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어린이를 위한 여러 사업  을 하고 있다.​ ​  어느 방면에서 매우 뛰어난 사람을 대가 또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선 20세기에 한국의 소설과 시 분야에서 뛰어난 거장 두 사람이 나왔다.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이 그들이다. 김동리(1913~1995)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훗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1934)되 며 문학가로 등단한 그는 1947년 첫 소설집 『무녀도』를 발표하  며 일약 한국 문단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단편 소설 「무녀도」, 「황토기」, 장편소설 『사  반의 십자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의 업적 중엔 빼어난 작가들을 많이 발굴하고 양성한 것도 있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와 『월간문학』이란 잡지를 발행하면서 많은 신인 작가들을 양성, 발굴하였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한국 문학을 빛내는 작가가 되었다. 1916년 경주에서 태어난 박목월(1916~1978)은 1939년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청록집』으로 유명해졌다. 자연을 소재로 한 이 아름다운  서정시들의 묶음은 평론가들로 하여금 세 사람을 ‘청록파’로 부르게 했다. 시집에 실린  박목월의 작품 중에는 「나그네」가 특히 유명하다. 박목월은 아름다운 동시와 수필도 많이 썼다. 그 역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  자를 길러내 한국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김주영(1939~ )과 이문열(1948~ )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베스트셀  러 작가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은, 직장생활을 하며 소설가의 꿈을 이뤘다는 점에  서도 공통점이 있다.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1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1971년 소설가로 정식 데  뷔했다.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천둥소리』를 비롯해 『객주』, 『화척』, 『홍어』  등이 유명하다. 대하소설 『객주』는 조선 말기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왕이  나 저명한 인물들 중심이던 역사소설에 새바람을 불어 넣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은 서울 출생이지  만, 원래 그의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의 두들마을이었다. 그는 유  년기를 고향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신문 기자 생활을 하며 소설가의 꿈을 키워 나  갔다. 1980년대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그는 『사람의 아들』을 비롯해 『황제  를 위하여』, 『우리 기쁜 젊은 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  다』 등의 히트작을 발표했다. 두 작가에게는 어린 시절을 경북 북부 지방에서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의 작  품에 종종 이 지역이 무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재능과 성실함을 두루 갖춘 김주영과 이  문열의 성공은 이들을 배출한 지역의 커다란 자랑거리이다. 오늘날 청송군에는 김주영  을 기념하기 위한 객주문학관이 있으며, 영양군 두들마을에는 한국 현대문학 연구와  문학도 양성을 위해 설립된 광산문학연구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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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계산성당 감나무 & 대구미술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계산성당 감나무 & 대구미술관

   계산성당 감나무 & 대구미술관계산성당에는 수령이 100년 넘는, ‘이  인성나무’라는 별명을 지닌 감나무가  있다. 천재화가 이인성이 1930년대에  그린 <계산동 성당>에 등장하는 나무  이기 때문이다.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에 있는 대구미술관은 대구를 대표하  는 예술 전시관으로, 이인성의 작품 5  점 외에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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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문학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문학관

   대구문학관향촌문화관 건물 3, 4층에는 대구문학  관이 있다. 3층 전시장엔 ‘대구, 명작의  본향’, ‘작가와의 동행’ 등 대구의 문학  과 관계 있는 전시실을 다양하게 갖추  고 있다. 4층엔 ‘대구문학을 체험하다’  라는 주제로 작가들의 책을 볼 수 있는  ‘문학 서재’, ‘기획전시실’ 등이 있다. 전  시회도 종종 열리는데, 2020년 1월에  는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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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마당깊은집문학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마당깊은집문학관

  마당깊은집문학관소설 『마당 깊은 집』의 실제 무대였던  대구 중구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배경  과 등장인물 관련 자료를 입체적으로  전시해 놓은 곳으로, 마당 깊은 집 모  형, 등장인물 소개, 대구의 풍경과 생활  상을 보여 주는 사진, 김원일 작가의 기  증 도서들을 전시한 공간 등이 마련되  어 있다. 1950년대 대구의 모습을 담  은 사진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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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향촌문화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향촌문화관

   향촌문화관대구시 중구 향촌문화관 지하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인 ‘녹향’이 있다. 향촌동은  1950년대부터 문인들의 거리로 유명했다. 문인  들이 즐겨 찾던 다방이나 술집도 많았는데, 향  촌문화관은 이 문화적 전통을 다양한 시각 자료  를 통해서 보여주는 이색 전시 공간이다. 1층에  기획전시실이 있고, 2층에 향촌동의 어제와 오  늘, 미래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설전시  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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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달성공원 이상화 시비, 이상화 고택, 상화동산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달성공원 이상화 시비, 이상화 고택, 상화동산

 달성공원 이상화 시비, 이상화 고택, 상화동산  1948년 대구의 시인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  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시비이다. 또 계  산성당 근처에 있는 이상화 고택은 이상화가  1939~1943년 사이에 살았던 집이다. 문학 애  호가라면 수성못 근처의 상화동산을 빼놓지 말  기를. 이상화를 기념하는 공원이 들어선 이곳에  는 이상화 외에도 근대 대구의 문학가들을 기념  하는 시문학거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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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

  일제강점기 때 오늘날 수성구와 남구 대명동 지역 대부분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들판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 이상화(1901~1943)에게 이 들판은 친근한 곳이었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뛰어났던 그는 이곳을 거닐며 하나의 시상을 떠올렸고, 1926년 잡  지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하는 시는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현실을 ‘빼앗긴 들’에 비유하며, 이곳에 서 있는 민족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 이 시는 해방 후에도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이자 대구 시민의 자  랑이 되었다.​  이상화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교육자였던 큰아  버지 이일우는 조선 청년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일깨워 준 우현서루를 운영한  인물이었다. 그런 가풍 밑에서 성장한 이상화의 삶이 다를 리 없었다. 1919년 3・ 1 운  동 당시에는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적발돼 서울로 피신하는 등 평생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오늘날 우리가 이상화를 ‘민족시인’으로 기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    1921년 1월 대구 출신의 젊은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개벽』이라는 잡지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했다. ‘빈처’는 가난한 아내라는 뜻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내가 가난한 것은 다른 직업은 거들떠보지 않고 소설 쓰기에만 열중하는 남편 때문이다. 소설의 첫 대목에서 소설가의 아내는 “그것이 어째 없을까?”라고 중얼거리며 옷장 문을 열어 저고리를 찾는다. 그것을 전당포에 잡혀서 아침거리를 장만하기 위해서이다. 형편이 그리 안 좋아도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결말 부분에서 남편이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 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말할 때에도 그녀는 “얼마 안 되어 그렇게 될 것이야요!”라며 격려할 뿐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빈처」는 발표 당시까지 무명 소설가였던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을 발표한 후 현진건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로도 그는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의 단편소설과 장편 『무영탑』 등을 쓰며 조선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빈처」를 발표할 당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이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 후 1927년부터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일했는데,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일로 체포되어 1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기자를 그만두고 현진건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조선의 작가들 가운데에는 일본에 우호적인 작품을 쓰지 않으면 생계를 잇기가 힘들어 친일문학가로 변절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현진건은 가난할망정 일본에 굴복하지 않았다. 형편이 힘들어지자 작품 활동 틈틈이 생계 유지를 위해 집에서 닭을 치면서도 끝내 지조를 꺾지 않았다. 이처럼 참된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현진건이었지만, 아쉽게도 조선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세상을 떠났다. 이상화와 현진건 외에도 근대에 활동한 대구 출신 유명 문학가는 여럿이다. 글로 사귄 벗을 문우라고 하는데, 현진건과 이상화는 비슷한 또래인 이장희, 백기만과도 문우사이였다. 천재적 재능을 지닌 시인 이장희(1900~1929)는 1924년 발표한 「봄은 고양이로다」로유명하다. 어느 봄날에 고양이를 관찰하며 쓴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애송하고 있다. 시인 백기만(1902~1967)은 3・ 1 운동 때 이상화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모의했던 문학가였다. 그는 1951년 생전에 시집을 발간하지 못하고 죽은 친구인 이상화, 이장희를 추모하며 두 사람의 시를 모아 시집을 펴낸 바 있다. 또 이상화가 죽은 뒤에는 대구 달성공원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이상화 시비를 세우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소설가 김원일(1942~ )은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를 다룬 빼어난 소설을 여럿 썼다. 그중 하나가 1988년에 발표한, 대구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인 『마당 깊은 집』이다. 194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원일은 소년 시절에 대구로 이사 와 대구시 중구 장관동에 있는 마당 깊은 집에서 살았다. 실제로 소설의 중심 공간이 된 곳이다.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몇 년 뒤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그 덕에 소설의 배경인 대구의 거리, 대구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원일은 『마당 깊은 집』 발표 후에도 『마음의 감옥』 등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이 집에 모여 살게 된 여섯 가구, 22명의 인물들에 얽힌 사건들을 소년 길남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소설이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밑에서 누나, 두 명의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길남은 돈을 벌기 위해 신문팔이에 나선다. 또 한 명의 주요 인물인 길남의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며 아이 넷을 키우느라 헌신하는 여성이다. 소설에는 대구의 여러 거리와 시장이 등장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1954년 대구의 풍경이 눈앞에 절로 그려진다. 대구 도심의 교동시장과 종로거리는 물론, 진골목(마당 깊은 집이 있던 골목)의 모습도 눈에 잡힐 듯 생생하다. 현재 종로거리에는 신문팔이에 나선 길남이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품 등이 있다. 계산성당 근처에는 이 소설을 기념하는 공간인 마당깊은집문학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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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노래와 그림
대구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노래와 그림

 1922년 경상남도 마산에 있는 창신중학교에는 대구 출신의 음악 교사 박태준(1900~1986)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동료 교사인 이은상에게 대구 계성학교에 다니던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청라언덕 이야기부터 학창 시절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학생 이야기까지. “박 선생은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시는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듣던 이은상의 말에 박태준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대구가 그립고, 나 홀로 좋아했던 그 여학생이 생각나기도 하고….” 노래 하나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빼어난 문학가이기도 했던 이은상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노랫말을 지었다. 여기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탄생한 가곡이 바로 〈동무 생각〉이다. 그중 1절의 가사를 음미해 보자.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백합 같은 내 동무야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청라언덕은 박태준이 다녔던 계성학교 건너편에 있는 언덕 이름으로,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의미한다. 학창 시절 박태준은 청라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등교했는데 백합 같은 한 여학생을 마주치곤 했던 곳이 그 언덕길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가곡 〈동무 생각〉은 한국음악사 최초의 가곡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가 낳은 음악가 박태준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 창신학교와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많은 가곡과 동요를 작곡했다. “뜸북 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국민 동요 <오빠 생각>도 그의 작품이다. 그 후 박태준은 미국에서 합창 지휘를 공부한 후 돌아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국내의 합창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구에서 1938년 창단한 지역 최초의 일반 합창단(대구합창협회)을 지휘한 인물도 그였다. 현재 청라언덕에는 청소년 시절의 순수한 그리움을 아름답게 표현한 〈동무 생각〉 노래비가 서 있다.1912년 대구 남성로에서 태어난 이인성(1912~1950)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보통학교를 마친 후 상급학교 진학 대신 화가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웠다. 17세 때 소파 방정환이 주최한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천재 소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듬해에는 당시 최고의 경연대회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명성을 굳혔고, 지역화가들의 모임인 ‘향토회’에 가입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이들의 도움으로 이인성은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는 화가로 성장하여 〈경주의 산곡에서〉, 〈가을 어느날〉, 〈해당화〉 같은 향토색 짙은 명작을 발표했다. 어떤 미술평론가는 그를 ‘조선의 보물과 같은 화가’라고 평가하였다. 유럽의 회화 사조인 인상파・ 야수파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수채화와 유화 분야에서 자신만의 개성 있고 과감한 표현법으로 명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이인성양화연구소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쓰는 등 대구의 서양화 보급과 발전에도 큰 공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총기 오발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그림은 여전히 눈부시다. 이인성을 기념하여 매년 대구에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인 1명의 화가를 선정하여 이인성미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이인성 대표작 감상하기2019년 11월~2020년 1월 대구미술관에서는 ‘화가의 고향, 대구’라는 타이틀로 ‘이인성 특별전’이 열렸다.약 20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회에서는 〈계산동 성당〉과 〈팔공산〉 등 전시 주제와 어울리는 작품들도 여럿 감상할 수 있었다. 현재 국내 유명 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 가운데 대표작 몇 점을 소개한다.   〈경주의 산곡에서〉 1934년,캔버스에 수채, 71×89.5cm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황토의 붉은색과 파란 하늘의 강렬한 대비, 기와 파편과 첨성대 등 옛 신라의 수도를 상징하는 소재들이 어우러져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을 어느 날〉 1934년,캔버스에 유채, 96x161.4cm흔히 고갱의 그림과 대비되는 작품이다. 파란 가을 하늘과 들판 가득한 식물들 가운데 시든 해바라기, 그리고 바구니를 든 여인과 뒷모습의 소녀가 주는 색의 대비가 쓸쓸하면서도 찬란하다. 거칠고 강한 묘사에서 향토색이 느껴진다.    〈계산동 성당〉 1930년경,종이에 수채, 35.5x45cm오후의 햇빛 속에 서 있는 계산성당의 풍경을 불투명 수채물감으로 표현했다. 붉고 푸른색이 강조된 가운데 하얀 첨탑이 뚜렷한 대비 효과를 보여 준다. 그림에 등장하는 감나무는 이 그림 때문에 유명해져서 ‘이인성나무’라고 불린다. 계산성당에 가면 그림 속의 나무를 실제로 볼 수 있다.     〈사과나무〉 1942년,캔버스에 유채, 91×116.5cm일제강점기에 대구는 사과의 고장으로서 전국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이인성이 계산성당과 더불어 고향인 대구를 소재로 하여 그린 빼어난 작품이다. 원래 명덕초등학교에 기증되었던 작품으로 현재는 대구미술관에 기탁되어 관리하고 있다. 과거 사과밭이 많았던 산격동에 이인성사과나무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이인성의 작품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음악의 도시 대구엔 음악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대구에 대한민국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1946년에 문을 연 ‘녹향’은 이창수라는 음악애호가가 향촌동 자택의 지하실에 마련한 공간이었다. 축음기와 함께 보유한 클래식 음반의 수는 500여 장.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예술가들이 대구로 몰려들자 녹향은 대한민국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 감상 외에 시 낭독회, 출판 기념회 같은 문화행사도 자주 열렸다. 1958년 녹향은 향촌동에서 남일동으로 이전했다. 시간이 흘러 고전음악감상실이 늘어나고 서양 팝송의 인기가 치솟자 녹향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경영난으로 이사만 10여 차례나 했음에도 꾸준히 영업을 이어갔다. 2011년 이창수 사장이 작고한 뒤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하던 녹향은 2014년 들어 마침내 폐업을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대구의 문화예술인과 시민이 뜻을 모아 ‘녹향 살리기 운동’을 벌였는데, 여기에 감동한 이창수의 유족이 녹향의 자산인 2000여 장의 음반과 축음기 등을 대구시 중구에 기증했다. 덕분에 중구 향촌문화관 지하 1층에서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한 녹향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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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한 경상북도의 고개와 길
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한 경상북도의 고개와 길

 길은 어디에나 있다. 도시와 도시, 도시와 촌락을 잇고, 산골마을을 오가게 하며 실핏  줄처럼 뻗어 간다. 옛날에도 지방과 지방을 잇는 길이 있었다. 그중에 경상북도와 다른  지역을 이어 주는 고갯길에는 이런 길들이 있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고갯길, 문경시 계립령(하늘재)문경시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미륵리 사이에는 계립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우리말로 ‘하늘재’라는 이름을 가진 고개로, 온달장군, 마의태자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 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가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제8대 아달라왕 3년(156)에 계립령에 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계립령은 신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할 때 군사들이 이동하는 길이 되었다. 고려 말기엔 공민왕이 고려를 침범한 홍건적의 공격을 피해 이 고개를 넘어 경상도로 피란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삼국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였던 죽령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689m 높이의 이 고개는 문경의 계립령 못지않은 역사를 지녔다. 죽령을 개척한 인물 또한 신라의 아달라왕이었는데, 서기 158년 이곳에 길을 냈다. 죽령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장수왕 말년인 470년에 죽령은 고구려의 땅이 된다. 그러다가 다시 신라의 영토로 회복된 것은 6세기(551년) 진흥왕 때였다.  이후 신라는 죽령 북쪽으로 땅을 크게 넓혔고, 한강 유역마저 손에 넣게 된다. 죽령 길은 긴 세월 동안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2001년 죽령 아래에 터널이 뚫린 후부터 자동차들은 굽이굽이 산으로 뻗은 도로를 통하지 않고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문경새재의 통행량, 조선의 고개 가운데 으뜸!조선시대에 영남 지방에서 수도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였다. 당시 사람들은 영남대로를 따라 대구–칠곡–선산(구미)-상주–문경을 거쳐 충청도의 충주, 경기도의 안성과 용인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 문경새재의 ‘새재’는 순우리말로 ‘새도 날아 넘기 힘들 만큼 높고 힘든 재(고개)’라는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자 이름도 ‘새 조(鳥)’에 ‘고개 영嶺)’이 붙은 ‘조령’이다. 조령에 길이 난 것은 조선시대 초기였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있는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전국의 고갯길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다닌 길이었다. 특히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급제의 큰 꿈을 안고 지나던 길이어서 ‘과거길’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후 더 유명해진 고개, 추풍령서울-부산 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 것은 1970년이었다. 이 도로가 생긴 후 전국에 널리 알려진 고개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 경북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 사이에 있는 높이 221m의 추풍령이다.  길 이름을 지을 땐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까? 그 지역의 특성이나 장점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이 많고 동해바다를 낀 경상북도에는 각 지방마다 아름다운 길이 있다. 그 중 몇몇 길의 이름에 담긴 뜻을 알아보자.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호미반도는 호랑이를 닮은 한반도 지도에서 꼬리 모양 지역에 위치한 반도이다. 호미의 호(虎)는 호랑이, 미(尾)는 꼬리를 뜻한다. 예로부터 포항 항구의 천연 방파제가 되어준 반도로서 이곳 해안선 58km를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에는 ‘해안둘레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파랑길 & 영덕군 블루로드‘해파랑길’은 대한민국의 동해안 탐방길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것이다. 해파랑에서 ‘해’는 떠오르는 해를, ‘파랑’은 푸른 바다를 뜻한다. 해파랑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트레킹 코스로, 길이가 무려 770km다. 경상북도의 동해안 해안 길도 해파랑길에 속해 있다. 영덕군에는 동해안을 따라 조성된 트레킹 코스에 블루로드라는 이름을 붙인 길이있다. 푸른 길이라는 뜻의 영어 이름을 지닌 블루로드는 영덕군에 있는 대게공원 에서 출발-축산항구-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64.6km의 길이다.    안동 선비순례길선비는 옛날에 글공부를 많이 하고 품행이 올바른 사람을 일컫던 말이다. 안동 선비순례길은 안동이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했던 역사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다. 총 9개 구간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넓은 안동호의 풍경, 다양한 유교문화 유적을 두루 구경할 수 있는, 총길이가 91km에 이르는 길이다. 청송・ 영양・ 봉화의 갸름한 외씨버선길경상북도 북부에 있는 청송군, 영양군, 봉화군은 아름다운 산, 맑은 공기와 물로 유명한 청정지역이다. 이런 깨끗한 자연환경을 활용해 이들 세 지역과 강원도 영월군 지역을 잇도록 조성된 길이 바로 ‘외씨버선길’이다. 볼이 좁고 갸름한 외씨버선처럼 길 모양도 길게 뻗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양군 출신 시인인 조지훈의 「승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라는 시 한 자락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1206년 대구 근처에 있는 경상북도 경산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9살때 집을 떠나 스님이 되었다. 구족계를 받으며 이름을 회연으로 하였는데, 나중에 일연으로 바꾸었다. 절에서 열심히 공부를 한 일연은 22살이던 1227년 스님들이 치르는 과거에서 1등으로 합격했다. 일연은 장원급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에겐 아직도 공부할 것이 많아.” 이렇게 생각한 일연은 고향 근처에 있는 대구의 비슬산으로 내려왔다. 비슬산에 있는 암자에서 수년간 공부한 일연은 고려에서 가장 권위 있고 존경받는 스님이 되었다. 일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 곳곳의 절을 찾아다니며 불교를 공부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264년부터 몇 년 동안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오어사, 대구의 비슬산 인홍사에서 제자들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1277년부터 1281년까지는 경상북도 청도에 있는 운문사에서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그 사이 일연은 우리 역사 속 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삼국유사』는 바로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역사서이다. 승려가 된 후 대구・ 경북의 여러 길을 걷고 또 걸었던 일연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도 경상북도에 있는 절이었다. 오늘날 군위군에 있는 인각사라는 절이다. 그가 인각사에 온 것은 군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시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일연은 인각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삼국유사』는 고대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 나라의 역사, 스님과 불교 문화재 이야기, 전설 등을 기록한 책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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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향토역사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향토역사관

대구향토역사관달성공원 안에 있는 전시관으로, 달성공원과 대구시 관련 역사 자료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도시 역사와 생활문화의 변천사를 알려 주는 2700여 점의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2개 전시실을 상설 운영 중이다. 구석기부터 현대까지의 대구 역사, 대구의 교육, 민속예술, 건축, 산업 전반을 알고 싶은 이에게 유익한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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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북성로 공구거리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북성로 공구거리

북성로 공구거리달성공원 건너편 북성로 공구거리 입구에는 망치와 펜치 등 여러 공구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크게 서 있다. 공구거리에서 다양한 공구를 구경하면서 가게마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내건 간판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관심있는 사람은 공구박물관도 꼭 들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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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의료・선교박물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의료・선교박물관

  의료・선교박물관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옆 청라언덕에는 두 개의 작은 박물관이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4, 25호인 선교박물관과 의료박물관이다. 선교박물관은 과거 선교사들의 사택을 개조한 곳으로 1, 2층에 각종 성경과 선교 유물, 기독교의전래 과정 등을 알려주는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있다. 의료박물관 역시 미국인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1800년대부터 1900년대에 이르는 동서양의 의료기기를 다양하게 소장・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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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근대역사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근대역사관

 대구근대역사관근대부터 현대까지의 대구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원래 1932년 일본이 세운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쓰다가 오늘날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돼있어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박물관은 1,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근대의 대구’, ‘구국의 정신’, ‘교육도시 대구’, ‘역사연표실’ 등의 전시 공간과 교육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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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경제 발전과 함께해 온 대구의 길과 골목
문화·경제 발전과 함께해 온 대구의 길과 골목

   봉산문화거리대구에도 크게 자랑할 수 있는 미술의 거리가 있다. 중구에 있는 봉산문화거리이다.봉산동 대구학원에서 봉산육거리에 걸쳐 뻗어 있는 이곳에는 크고 작은 화랑 20여 개가 들어서 있고, 연중 미술 전시회가 열린다.1993년부터는 매년 10월 약 1주일에 걸쳐 봉산미술제도 개최되고 있다. 거리 좌우로들어선 화랑에서는 다양한 작품전과 초청 강연회가 열린다. 이 외에도 설치미술 감상,미술품 경매 등 흥미로운 미술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2004년 개관한 봉산문화회관은 또 다른 자랑거리로서 연중 다양한 전시회, 연극과 음악 공연, 문화예술 강연회를선보이고 있다.김광석다시그리기길김광석은 1964년 대구시 대봉동에서 태어나 1980~1990년대에 활동한 유명 포크가수이다. 그가 부른 노래들은 시간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중구 대봉동에 있는 김광석다시그리 기 길은 1996년 사망한 김광석을 추모하고 그의음악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벽화 거리이다. 350m 길이의 벽면을 따라 김광석 조형물,그의 초상화와 노래 가사들이 다양한 모습의 벽화로 표현되어 있다. 길 근처에는 김광석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김광석스토리하우스가 있다.     대명동 공연문화거리연극 소극장, 극단 사무실 외에 미술작업실, 음악연습실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실이 있는 곳이며, 1년 내내 다양한 연극, 음악 공연이 펼쳐지는 문화와 예술의 거리이다. 원래 유흥가였으나 대구 연극인들의 노력에 의해 공연문화거리로 탈바꿈했다. 이거리에선 그동안 ‘소극장페스티벌’, ‘한울림골목연극제’, ‘대명공연문화거리 로드페스티벌’ 같은 다양한 예술축제가 열렸다. 2020년엔 이 거리에서 ‘대구국제힐링공연예술제’가 열렸다. 이 행사는 매년 개최되던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을 힐링예술제로 변화, 발전시킨 행사였다.수창동 대구예술발전소와 수창청춘맨숀예술의 거리는 아니지만, 대구의 예술과 문화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대구시 중구 수창동에 있는 대구예술발전소와 수창청춘맨숀이다.수창동에는 오래된 연초제조창(담배를 만들던 곳) 건물이 있었다. 노후한 공장 건물은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2013년 대구예술발전소로 부활하였다. 이곳은 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전시회와 음악 공연 등 다양한 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다.대구예술발전소 옆에 있는 수창청춘맨숀은 옛 연초제조창 직원들이 살았던 아파트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청년작가들의 예술 활동 공간이다. 이곳에선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아트페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웹툰교실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리고 있다.    대구 시내에는 대구의 경제 발전과 함께해 온 오래된 거리들이 있다.먼저 향촌동엔 수제화거리가 있다. 1970년대에 생긴 약 300m 길이의 거리로, 수제화재료인 가죽을 거래하는 가게부터 수제화를 만드는 가게까지 60여 개의 가게가 자리하고 있다. 또 이 거리에는 수제화의 역사, 제작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향촌수제화센터가 있다.대구시 중구에 있는 교동은 조선시대에 향교가 있는 동네여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한국전쟁 시기에 이 동네에 생긴 교동시장에는 귀금속거리, 전기전자제품거리가 있다.교동 귀금속거리의 역사는 1970년대 교동시장에 시계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부터시작되었다. 현재 교동과 동성로에 걸쳐 있는 이 지역은 대구패션주얼리특구로 지정되어 있다.일제강점기 때 달성공원 근처에는 섬유공장이 많이 있었다. 가까이에는 대구에서 가장 큰 서문시장이 있다 보니 오늘날 대신동, 달성동 지역에는 섬유 관련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들이 많아 명물 골목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달성공원 건너편에는 미싱거리, 서문시장 근처엔 오랜 기간 양말 가게들이 지켜 온 양말골목이 있고, 섬유회관 건너편에는 타월(수건)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가 있다.     대구역 앞 네거리에서 달성공원에 이르는 북성로, 태평로, 수창동, 인교동 등의 거리에는 공구를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대구의 경제 발전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흔히 북성로 공구거리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여기서 취급하는 공구의 종류는 건축은 물론 공예와 일상에 필요한 도구를 포함해 산업 전 분야를 망라하며, 그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북성로의 역사는 100년을 넘게 헤아린다. 1907년 대구읍성이 철거된 후 읍성 북쪽에새로 북성로가 났고, 이곳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들이 많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때 북성로는 대구 최고의 번화가로 도로 포장부터 가로등 설치, 백화점도 대구에서는이곳이 최초였다.1945년 광복이 되고 북성로의 일본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 후 한국전쟁 시기부터이 거리는 오늘날과 같이 공구 전문 거래 지역이 되었다. 전쟁 기간 대구에 많은 부대가주둔함에 따라 공구 거래와 수리 사업이 활발해진 덕분이다. 1960년대부터는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거래가 더욱 활발해졌고, 북성로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공구전문 거리로 성장할 수 있었다.1990년대 중반 북구 산격동에 대구종합유통단지가 생기면서 일부 공구점들이 그곳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북성로 거리엔 많은 공구점이 영업 중이다. 공장, 건설 현장, 집수리 등에 필요한 일체 도구들을 판매하거나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한다. 서문시장과 더불어 대구 경제 발전사의 살아있는 증거를 꼽으라면 바로 이곳, 북성로 공구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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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근대 역사를 담고 있는 도심의 길
대구의 근대 역사를 담고 있는 도심의 길

  해마다 많은 여행객이 대구를 찾는다. 대구의 여행 프로그램 중에는 2019년까지 3년 연속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것이 있다. 중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골목 투어 프로그램이 그것인데, 중구의 오래된 건축물을 답사하고 길과 골목을 걸으며 대구의 역 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중구 지역은 고대부터 대구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오늘날 조선시대 건축물은 경상감 영공원의 선화당 등 몇 개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말기부터 20세기 초 근대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 여럿 남아 있다.  길과 골목 사이사이에 자리한 채 저마다 도시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건축물들! 그 건 물, 그 자리에 깃든 대구의 역사는 어떤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인기 있는 골목 투어 코스를 따라가 보자.   제1코스: 경상감영·달성길 ​3.25km 길이의 코스. 조선시대 행정중심도시였던 대구의 자취와 20세기 초 상업도시 로 빠르게 성장한 대구의 산업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길이다. 경상감영공원, 대구근대 역사관, 대구의 1950~1960년대를 재현한 향촌문화관, 경찰역사체험관, 20세기 초 대구 최대 번화가였던 북성로, 삼국시대의 토성이 남아 있는 달성공원 등을 볼 수 있다.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 ​1.64km의 이 코스는 볼거리가 특히 많은 곳이다. 서문시장 맞은편에 있는 청라언덕, 선교사주택, 3・ 1만세운동길, 대구 최초의 성당인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건물,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이 살았던 집, 대구 약령시 거리 등을 볼 수 있다.    제3코스: 패션·한방길 2.65km 코스로 동성로와 남성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길이다. 약전골목, 귀금속거리, 대구 최고 번화가인 동성로, 전국 3대 전통시장 중의 하나인 서문시장 등을 볼 수 있다.   제4코스: 삼덕봉산문화길 4.95km 길이로 ‘젊음과 예술의 거리’를 주제로 하는 길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대구 미술의 중심지인 봉산문화거리,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건들 바위, 대구 유교문화의 중심이 된 대구향교 등을 볼 수 있다.   제5코스: 남산 100년 향수길대구는 서양 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가 빨리 전파된 도시였다. 2.12km 길이의 제5코스에선 근대에 세워진 여러 종교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다. 천주교 순교 사적지인 관덕정순교기념관, 오래된 교회인 남산교회, 천주교 사제를 양성한 성유스티노신학교, 프랑스 루르드 성모동굴을 본떠 만든 성모당,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등이 있다.      골목 투어 코스 가운데 중구 동산동의 3・ 1만세운동길은 특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 코스이다. 계산성당 맞은편의 90개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좁은 길이지만, 대구의 독립운동역사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대구에서 3・ 1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일어났다. 3월 1일의 만세운동은 서울 등 일부 도시에서 일어났고 대부분 지방 도시들은 며칠이 지난 뒤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구에선 가장 큰 시장인 서문시장이 열리는 3월 8일에 맞춰 일어났다. 당시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이들은 대구 지역 종교 지도자와 학생들이었다. 특히 계성학교(현 계성고)와 신명여학교(현 신명고)의 교사와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다. 3・ 1만세운동길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지역 학생들이 일본 헌병의 감시를 피해 만세운동이 일어날 서문시장으로 향했던 길이다. 일부 학생들은 교복 대신 장사꾼 복장으로 독립선언서 낭독이 행해질 장소를 찾았다. 지금의 섬유회관 건물 맞은편에 자리한 시장 터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 1000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외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운동 참가자들의 행렬은 곧 대구의 도심을 향했다. 대구경찰서(현재의 경찰역사체험관)~종로~약전골목~달성군청(현재의 대구백화점 자리)을 잇는 거리가 만세소리로 메워졌다.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0일과 30일에도 열렸는데, 이때의 개최 장소는 지금의 염매시장 일대였다. 3・ 8 대구만세운동은 지금도 대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고자 매년 3・ 1만세운동길에서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대구 도심에는 사적 제290호인 계산성당을 비롯해 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전되어 있다. 그중 몇 곳을 살펴보자.  중구 남산동에 있는 성유스티노신학교(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는 대구 천주교회 초대 교구장이던 안세화 주교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해 세운 신학교 건물이다. 1913년에 착공해 1914년에 완공했다. 1층 정면부의 연속된 로마네스크 풍 아치 회랑이 일품으로 꼽힌다. 중구 남성로에 있는 교남YMCA회관(등록문화재 제570호)은 1914년에 세워진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의 청년들에게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웅변대회, 토론회, 강연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고, 1919년 3・ 1 만세운동 시기에는 대구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만세운동 계획을 의논한 곳이기도 하다. 중구 동산동에 있는 제일교회(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0호)는 대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고딕 양식의 2층 건물은 대구 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중구 달성로에 있는 아담스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은 계성학교의 건물 중 하나였다. 1908년에 지어졌으며, 1919년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 이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이웃사랑의 본보기가 된 서침달성공원 안에는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나무 이름이 독특하다. ‘서침나무’이다. 서침은 조선시대 초기 대구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 나무에 왜 사람 이름이 붙은 걸까? 서침의 집안은 대대로 지금의 달성공원이 있던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그가 살던 집터에 관아를 지으려고 하자 기꺼이 땅을 내놓았다. 나라에서 서침을 칭찬하며 그가 기부한 땅을 대신해 벼슬과 대구 지역의 다른 땅을 상으로 내리려 했다.  이때 서침은 이렇게 청하였다. “제가 상을 받는 대신 금년에 환곡을 빌린 대구 백성들이 내야 하는 이자를 줄여 주십시오.” 환곡이란 조선시대에 정부에서 먹을 것이 부족한 백성에게 식량을 빌려 주던 제도이다. 갚을 때는 이자를 계산해 빌린 것보다 많이 납부해야 했다. 나라에선 서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환곡을 빌린 대구 사람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이 서침의 고마운 뜻을 기념하는 나무를 심었으니, 그것이 달성공원에 있는 서침나무이다.​   민족종교인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골목 투어 제1코스인 경상감영·달성길을 거닐다 보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종로초등학교를 만날 것이다. 바로 이곳 교정에 ‘최제우나무(회화나무)’가 있다.​  1824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건 동학의 창시자였다. 이 민족종교는 머지않아 백성들 사이에 퍼져 갔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최제우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잡혀 간 최제우는 경상감영의 감옥에 갇혔는데, 그 시절 회화나무가 억울하게 희생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라 생각해서 나무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애국계몽운동 지도자 이동진, 이일우 부자골목 투어에는 독립운동 흔적 찾기 프로그램도 있다. 우현서루 터와 이일우 고택을 돌아보는 코스인데, 대구의 교육 역사와 관계 있는 유적들이다. 우현서루는 1904년 이동진이 청년에게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자 개인 재산을 털어서 세운 교육기관이었다. 이동진의 아들 이일우는 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를 운영하면서 많은 애국청년을 양성했다. 또 이동휘, 박은식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가 우현서루를 방문하기도 했다. 우현서루는 일본에 의해 1911년에 강제로 폐쇄되었다. 그러나 이 터에서 신식학교인 교남학교가 1921년에 개교했는데, 이 학교가 지금의 대륜중・ 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한국 현대문학의 개척자들 제2코스인 근대문화골목길로 넘어가 보자. 먼저 두사충이 살다간 뽕나무골목을 만날 수 있다. 또 이곳 계산동에는 근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한국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남긴 인물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제안한 대구의 기업가 서상돈, 일제강점기 때의 시인 이상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 한국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한 소설가 현진건이 살았던 집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이들 외에도 여러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들이 계산동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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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엔 또 어떤 박물관이 있을까?
경상북도엔 또 어떤 박물관이 있을까?

경상북도에 있는 여러 시와 군에는 그 지방 역사와 문화를 기념 하고 잘 보존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들이 있다. 이 중 널리 알려진 박물관 두 곳과 특별한 주제를 가진 박물관에 대해 알아보자.   고령 대가야박물관​고령군은 삼국시대에 대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던 곳이다. 이 역사를 기념하는 뜻에서 고령군에는 대가야읍이라는 이름의 행정구역과 2005년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이 있 다. 국내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으로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가운데 최대 규모 인 44호 무덤을 복원해 재현한 ‘대가야왕릉전시관’ 외에 대가야를 중심으로 고령 지역 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 전시하는 ‘대가야역사관’, 그리고 대가야 출신으로 가야금을 만 든 음악가 우륵을 기념하는 ‘우륵박물관’이 있다.    안동 유교문화박물관 등​안동시의 브랜드 슬로건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이다. 유교 문화가 크게 발전한 역 사와 전통을 기념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슬로건에 걸맞게 안동시에는 유교 역사와 문화재를 잘 간직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국내 유일의 유교 전문 박물관인 유 교문화박물관으로, 유교문화 관련 전시물과 프로그램이 풍부하다.이 외에도 안동에는 국내 최초로 유물 없이 디지털 콘텐츠(디지털 유물)로만 전시 내 용을 채운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안동공예문화전시관,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소주·전통음식박물관, 하회세계탈박물관 등 다채로운 콘텐츠의 박물 관이 들어서 있다. 한마디로 안동은 ‘박물관 도시’라 할 수 있다.  경상북도의 특색 있는 박물관​1985년에 개관한 포항시의 국립등대박물관은 등대를 비롯한 항로 표지 시설과 장비를 보존하고 전시하는 곳이다.조선시대에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가진 지명으로 인 해 과거를 보러 가는 응시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고갯길로 여겨진 문경새재의 고장답게 문경에는 길을 주제로 하는 옛길박물관이 있다. 또 과거 석탄의 대량 생산지였던 사실을 기념하는 석탄박물 관도 있다. 경북의 특색 있는 박물관으로는 상주시의 자전거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평탄한 지형인 상주시는 타 지역에 비해 자전거 이용자가 훨씬 많은 도시인데, 이런 생활전통 을 기념하여 세운 박물관이다. 이 외에 인삼이 유명한 영주에는 인삼박물관이, 청도에는 농기구박물관이, 김천에는 세계도자기박물관이 있다. 울릉도에도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박물관이 있으니, 독도박 물관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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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보물이 가득! 경북의 박물관
전시장에 보물이 가득! 경북의 박물관

 경상북도는 대한민국 여러 지방 가운데 문화재가 많은 고장 중 하나다. 신라와 가야 의 역사가 깃든 지역이고, 또 조선시대에 경상북도에서 유교문화가 발전한 것이 큰 이유 이다.  경상북도에 있는 국가 지정 국보는 52점, 보물은 260점이나 된다. 이 중 가장 많은 문 화재를 보유한 도시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이다. 그다음은 조선시대에 유교문화가 발 전했던 도시인 안동이다.  경주에는 많은 국보, 보물 등을 소장하고 있는 큰 박물관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다. 이곳엔 신라역사관 등 5개의 상설전시장이 있는데, 꼼꼼하게 유물을 살펴보려면 하 루가 부족할 정도이다.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를 방문해 소장 유물 중 국보·보물을 검색하면 38개의 문화재가 나온다. 이 중에서 5개의 문화재를 구경해 보자.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문화재로 지정된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종이다.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 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여 771년 그의 아들인 혜공왕 때 완성하였다. 그래서 종 이름에 성덕대왕 이름이 붙었다. 높이가 365.8cm 인 종의 꼭대기 에는 용뉴(종 꼭대기 부분의 장식)와 음통이 있다. 종 표면에는 당초무늬, 비천상, 연꽃 문양 등이 양각되어 있다. 화려한 장식과 우아한 형태,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종소리를 내는 종으로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경주에서 출토된 신라금관 중에서 화려함이 가장 빛나는 금관이다. 높이 32.5cm의 금관으로, 머리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 ‘山’ 자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두 줄로 있는 형태이다.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렸다. 1973년 경 주 제155호 고분에서 발굴된 것인데, 발굴 때 천마도(하늘을 나는 말의 그림)가 함께 나 와서 이 무덤의 이름을 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허리띠(국보 제190호 )​천마총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된 것이다. 허리띠 길이는 125cm, 드리개 길이는 73.5cm이다. 얇은 금으로 만든 과판(띠의 겉에 달아서 꾸미는 낱낱의 쇠붙이) 44개, 띠 고리와 띠고리 끝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소에 찼던 허리띠가 아니라, 천마총에 묻힌 왕 또는 귀족의 장례식에 맞춰 무덤에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275호)​말을 탄 무사 모양의 토기로, 고대 금관가야 지방인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토된 것이 다. 높이 23.2cm로 말의 등에는 뿔 모양의 2개 잔이 좌우 대칭으로 있다. 말의 몸통에 는 갑옷이 입혀져 있다. 말 위엔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무사가 앉아 있는데, 오른손에 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다. 세부 묘사가 매우 빼어난 문화재이다.  서수 모양 주전자(보물 제636호)​경주시에 있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주전자이다. 서수는 복을 가져다주는 상서 로운 동물을 가리킨다. 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형상을 한 동물이 굽다리 위에 올려져 있다. 몸통 속은 비어 있고, 등에는 깔때기 모양의 주입구가 있다.  국보 중엔 건축물, 조각품이 많다. 그렇지만 역사적 가치가 큰 그림, 문서, 책이 국보 로 지정된 경우도 많다. 그중 경상북도에 있는 국보 3개를 구경해 보자.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경상북도 영주시의 소수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유학을 보급한 고려 시대 후 기의 학자 안향의 초상화이다. 고려시대 초상화의 화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 료이다.  징비록(국보 제132호)​​조선 중기의 문신인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군사, 외교 분야에서 헌신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류 성룡이 조선에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전쟁 시작 때 부터 끝날 때까지 있었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장양수 홍패(국보 제181호)​​홍패란 국가에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발급한 합격 증명서이다.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이 문서는 고려 희종 1년(1205)에 과거에 합격한 장양수에게 내린 홍패이다. 가 로 93.5cm, 세로 45.2cm로 황색 마지 두루마리에 쓰여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홍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이다.  ​1988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 어느 논에서 한 농부가 포클레인으로 논 에 박혀 있는 큰 돌을 캐내는 공사를 벌였다. 농부는 캐낸 돌을 논두렁에 그냥 두었 다. 그 사이 비가 몇 번 내려 돌에 붙어있던 흙들이 씻겨 내려가면서 돌에 새겨진 한 자가 드러났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 우연히 돌에 새겨진 한자를 발견해 면사무소에 연락하였고, 면사무소에선 경상북도 도청에 연락해 전문가들이 와서 돌을 조사했다. 바로 울진 봉평신라비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글씨는 비석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 수는 400자 정도였다. 내용은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갈 무렵 주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신라에서 6부 회의 를 열고 저항운동을 진압한 후에 이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신라가 경주 동북 방면 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석으로, 법흥왕 시대인 524년경에 세워진 비석이었다. 학자 들은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신라의 상황과 여러 제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길이가 204cm, 아래 폭 54.5cm인 이 비석은 오랫동안 논에 방치되어 일부분이 파손된 상태지만 역사적으로 가 치가 큰 것이어서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울진 군에 이 비석 의 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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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경북대학교박물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경북대학교박물관

 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과 더불어 대구를 대표 하는 박물관이다. 대구시 북구 경북대 학교 안에 있는 박물관으로 1959년 문 을 열었다. 보물 제335호인 석조비로 자나불좌상, 제516호인 대구 무술명오 작비, 제997호인 봉화 북지리 석조반 가상 등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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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국립대구박물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국립대구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에서 발굴된 많은 문화유 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국보 문화재부터 선사시대 유물까지 다양한 전시 유물들을 구경하면서 대구와 경 북의 역사를 깊이 있게 체험학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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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동화사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동화사

 동화사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인 동화 사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곳이다. 동 화사는 중심 건물인 대웅전을 중심으 로 주변에 여러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 다. 동화사에 있는 보물 문화재를 다 돌 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동화사 홈 페이지를 방문해 경내 지도를 살펴본 후에 미리 답사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 다. 동화사에는 보물 문화재 외에 불교 문화관, 세계 최대의 석불인 약사여래 대불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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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달성토성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달성토성

 달성토성 ​대구의 오랜 역사를 대표하는 공간인 달성토성 은 대구도시철도 3호선 달성공원역에서 아주 가깝다. 토성 내에는 동상과 비석 등 대구와 경 북의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되는 여러 조각품이 있다. 달성토성 안에 있는 대구향토역사관을 방문하면 대구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달성토성 의 옛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전시물 중엔 국채 보상운동을 알리는 신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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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국채보상운동기념관 & 서상돈 고택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국채보상운동기념관 &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기념관 &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대구 도심 국채보상운 동기념공원 안에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하에 제1전시실이, 1층에 제2전시실이 있고, 2층에는 기획전시실이 있다. 기념공원에도 볼 것이 많다. 매년 1월 1일 새해맞이 타종 행사 때 치는 달구벌대종이 있다. 또 꽃과 나무가 잘 가 꿔진 산책로를 따라 ‘명언 순례의 오솔길’이 나 있다.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제안하였고 이 운동 을 이끌었던 서상돈은 당시 대구 지역 경제계, 종교계 지도자였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서상 돈의 고택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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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전체가 문화재! 대구의 역사와 함께해 온 달성토성
땅 전체가 문화재! 대구의 역사와 함께해 온 달성토성

대구의 문화재는 모두가 소중하지만, 대구시 중구에 있는 달성공원은 특별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 지역이다. 흔히 달성공원이라고 부르지만, 역사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다면 달성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토성은 흙으로 쌓은 성을 말한다.  달성토성은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고대의 토성이다. 달성토성을 쌓은 때는 신라 첨 해왕 15년(261)으로 추측된다. 달성토성은 국가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시대 에 조성된 달성토성은 1601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기 전까 지 대구의 정치·군사·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잠시 경상감영이 있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공간인 달성토성은 조선 말기에 시작된 일본의 침략으로 수난 을 당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일본군이 동학군 진압 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왔고, 일본군 한 부대가 달성토성에 주둔했다. 급기야 1907년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달성토성은 공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 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심지어 일본은 1914년 달성토성 중심부에 신사(일본에서 나라의 신, 또는 신격화된 왕실 조상이나 국가유공자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신사는 광복 1년 후인 1946년에 철거되었다.  달성토성 안에 있는 대구향토역사관을 방문하면, 대구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달성토 성의 옛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문화재 중에는 사적, 자연유산, 무형문화재도 있다. ​달성토성 외에 대구 유명 사적지로는 사적 제262호인 대구시 동구 불로동 고분군이 있다. 5세기경에 조성된 수십 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있는 곳이다.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유산은 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데, 대구에 있는 자연 유산에는 천연기념물 제1호인 도동 측백나무 숲 외에 달성군 비슬산 암괴류가 있다. 암 괴류란 큰 자갈 또는 암석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산의 경사면을 따라 골짜기나 평지로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한다. 특이하게도 이 암괴류는 지금도 흘러내리고 있다.  무형문화재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연극, 무용, 음악, 공예기술 및 놀이 등 구체적인 형 체가 없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대구시가 지정한 무형문화재는 17개인데, 전통음악부터 전통공예품을 만드는 기술까지 다양하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는 수성구의 고산농악이다. 고산농악은 예로부터 이 마 을에서 정월 대보름 때 마을 제사를 지내는 한 과정으로 행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무 형문화재 제2호는 서구 비산동 지역에서 전해 오는 날뫼북춤이다. 옛날 이 동네 사람들 이 지방관리의 순직을 추모하기 위해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하였 다고 한다.  이 외에 대구의 무형문화재에는 욱수농악(대구시 수성구), 천왕메기(대구시 서구, 음 력 1월에 마을의 평화와 복을 비는 전통행사), 농사를 지으며 부르던 전통노래인 공산농 요(대구시 동구)와 하빈들소리(대구시 달성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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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에서 농악까지, 다양한 대구의 문화재
고인돌에서 농악까지, 다양한 대구의 문화재

  신천에 있는 공룡 발자국 화석1994년 9월 26일 아침, 어느 대구 시민이 신천둔치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신천은 군데군데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던 시민이 속도를 늦추고 신천을 바라보다가 움푹 파인 구덩이가 줄지어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것은 혹시 공룡 발자국?’ 이렇게 생각한 시민은 곧 이 사실을 알렸다. 이튿날 소식을 듣고 고생물학자가 신천에 와서 구덩이들을 꼼꼼하게 살핀 후 말했다. “이것은 백악기 시절의 공룡 발자국이 분명합니다.” 대구 최초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은 동신교를 기준으로 수성교 방향 약 300m 지점이었다. 그 이후 대구에선 와룡산 지역, 노곡교 건너 고속도로변, 동구 지묘동 등 여러 곳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약 2만 년 전 최초의 대구 주민대구에서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약 2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구석기시대에 대구에 사람이 살았던 증거는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대구 월성동 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좀돌날(몸돌에서 떼어 낸 아주 작은 돌 조각)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대구에 사는 사람은 늘어났다. 정착하여 농사 짓는 사람들이 생겼다. 서변동(대구시 북구)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는 이 사실을 증명해 주는 유물이다. 토기 외에도 대구에선 많은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대구에 사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 중엔 우리가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지석묘가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대구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이것들은 대구광역시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수성구 사월동 지석묘군(대구광역시 기념물 제 9호), 수성구 상동 지석묘군(기념물 제12호), 달성군 천내리 지석묘군(기념물 제13호), 달성군 냉천리 지석묘군(기념물 제14호) 같은 것이다. 또 대구시 동구 각산동에도 고인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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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치던 돌이 신라시대 비석!
무심코 지나치던 돌이 신라시대 비석!

 1946년 임창순이라는 학자가 대구 시내를 걷다가 길가에 내놓은 길이 1m, 폭 70cm 의 돌을 발견했다. 돌에는 한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문 실력이 뛰어났던 임창 순은 그 돌이 신라시대 것임을 알아냈다. 그는 돌이 놓여 있는 집 의 주인을 설득하여 그 것을 대학으로 가져와 표면에 새겨진 글자를 전부 해석하였다.  비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글씨를 새긴 것으로, 글자는 크기와 간격이 일정하 지 않고 글씨의 줄도 똑바르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고아한 멋 이 있었다. 그것은 삼국시대 인 6세기 중엽 대구에서 저수지를 만든 과정을 밝힌 비석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학자 임창순은 잠시 대구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 보니 학교에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 곳곳을 뒤져 교내 수영 장 부근에 묻혀 있는 비석을 찾아냈다.  왜 비석이 사라진 것일까? 한국전쟁 때 이 학교 에 미군이 잠시 주둔하였는데, 이 비석 의 가치를 몰라보고 방치한 때문이었다.  비석은 신라의 국방정책 및 농업정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에 1969년 보물로 지정 되었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대구 무술명 오작비’이다. 보물 제516호로, 경북대학교박 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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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어떤 국보, 보물 문화재가 있을까?
대구에는 어떤 국보, 보물 문화재가 있을까?

   문화재는 종류가 다양하다. 나라에서 정한 문화재에는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 념물,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다. 시나 도 같은 지자체가 정한 문화재에는 시도유형문화재, 시도무형문화재, 시도기념물, 시도민속문화재, 시도등 록문화재, 문화재자료가 있다.  대구시 수성구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은 3개의 국보를 소장하고 있다. 국보 제182호, 183호, 184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들이다. 이 3개의 국보는 경상북도 구미 지역의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었다.  대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다. 대구 비산동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칼과 칼집 등의 유물이다. 각각 국보 제137-1호, 국보 제137-2호로 지정된 이 문화재는 현재 서울의 사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대구에는 나라에서 지정한 보물들이 꽤 많이 있다. 대구의 7개 구 중에서 국가 지정 보물이 많이 있는 곳은 달서구와 동구이다. 이 중 동구에 문화재가 많은 이유는 그곳에 팔공산이 있고 팔공산 곳곳에 신라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 있는 문화재 중에선 특이한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에 있는 석빙고(보물 제673호)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인데, 현 풍의 석빙고는 조선시대인 173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구 역사를 연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 중 하나가 『대구읍지』이 다. 조선시대 후기 대구의 역사와 모습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5호인 이 책은 대구 시민들에게는 국보나 다름없는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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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지정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또 어떤 게 있을까?
유네스코가 지정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또 어떤 게 있을까?

훈민정음 해례본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이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  조선왕조실록조선 제1대 왕 태조로부터 제25대 왕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왕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역사책.  직지심체요절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만든 책. 여러 경전과 법문에 실린 내용 가운데 좋은 구절만 뽑아 편집한 불교 서적이다.  승정원일기승정원은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실 역할을 한 관청이다.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을 총 3,243책으로 남긴 것이다.  조선왕조의궤조선시대에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 영접 등 나라의 큰 행사와 건축물, 왕릉의 건축 등을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 경판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해인사의 고려 대장경판 및 그 이후에 만든 불교 경판이다. 현재 해인사는 8만 7000여 장의 경판을 보유하고 있다.  동의보감1610년 허준이 집필하였고, 1613년 왕실 의료기관에서 간행한 백과사전식 의학책이다.  일성록1760년에서 1910년까지 151년 동안 왕이 한 일을 매일 일기체로 정리한 책.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으로,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부· 전남도청·광주시청·광주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생산한 5· 18 민주화운동 자료, 국회의 5· 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회의록,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중일기이순신 장군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  새마을운동 기록물1970년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대통령의 연설문과 결재 문서, 행정부처의 서류, 새마을지도자들의 성공 사례 원고와 편지, 새마을교재, 관련 사진과 영상 등 2만 2000여 건의 자료들이다. UN은 새마을운동을 농촌 개발의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의 유교 책판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간행하기 위해 나무에 새긴 판각으로, 현재 718종 64,226장이 있다.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1983년 KBS에서 한국전쟁등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상봉을 돕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으로, 이 방송을 통해서 많은 이산가족이 그리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의 생방송 녹화 원본 테이프, 담당 PD 업무수첩, 이산가족들의 신청서, 사진 등의 기록물이다.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조선시대 왕과 왕비, 세자 등을 책봉하거나 시호 등을 수여할 때 만든 의례용 도장과 책이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조선통신사에 관한 자료를 총칭하는 것으로 외교기록, 여정기록, 문화교류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신사는 조선 정부가 일본에 보낸 사신의 호칭으로, 통신사들은 일본 출장길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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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국보, 보물로 지정된 대구의 문화재
세계유산, 국보, 보물로 지정된 대구의 문화재

  대구에는 2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하나는 한국의 서원 9개에 포함되어 있는 도 동서원이다. 또 하나는 세계기록유산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다. 세계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서적, 문서, 편지 같은 역사 기록을 세계유산으로 정하는 것인데, 2017년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애국운동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빌린 국채(나랏빚)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정부의 힘만으로 는 일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웠다. 이대로 가면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907년 2월 대구에 있는 출판사인 광문사를 경영하던 김광제, 서상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국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서상돈이 이런 제안을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백성들이 돈을 모아서라도 국채를 갚아야 합니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했으면 합니다. 단연(담배를 끊는 것)해서 모은 돈으로 국 채 갚는 운동을 벌여 봅시다.”  ​이들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 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나랏돈으로는 해결할 도 리가 없으므로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이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제안하는 글을 실었다. 이들은 동시에 대구에서 담배 끊는 모 임인 단연회를 설립하여 모금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 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 국채보 상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서울에선 국채보상기성회라는 조직 이 만들어졌다. 곧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금에 참여했다. 상인, 노동자, 농민, 부녀자, 군인 등이 참여하는 범국민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당황한 일본은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국채보 상운동을 이끌던 대한매일신보사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8년 일본은 이 신문사 경 영자가 모금액 가운데 일부를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거짓 죄를 만들어 구속하였다. 신 문사 경영자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국채보상운동 열기 는 가라앉고 말았다. 비록 바라던 목표를 다 이루진 못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랏 빚을 갚기 위해 벌인 자랑스러운 애국운동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는 이 위대한 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딘 명예로운 도시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선언문, 회의록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과 이 운동의 기록물들이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연대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세계적 모범 사례라고 판단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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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경상북도의 축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경상북도의 축제

   고령 대가야체험축제 고령군은 서기 42년부터 520년간 대가야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200여 기의 지산동 고분군(사적 79호)과 암각화, 가야 토기, 산성 등 많은 문화재가 즐비하다. 그런 곳이니 만큼 고령군에서 대가야체험축제가 열리는 것은 당연하다. 경북을 대표하는 역사・문화 이벤트의 하나가 된 이 축제는 2019년에도 대가야 병사 체험, 토기 체험, 생활 체험, 가 야금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호응을 얻었다. 축제 기간이 아니라도 고 령읍에 있는 대가야박물관은 한 번쯤 찾아볼 만한 곳이다. 대가야 유물을 집대성한 전 시관에서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충실하게 체험학습할 수 있다.   경주 신라문화제 ​한국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 가운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행사의 하나가 바로 신라문화제이다. 축제의 중심 무대는 경주 시내에 있는 황성공원으로 2019년까지 총 47회가 열렸다. 축제 하이라이트는 시가지 퍼레이드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신라 인 분장을 하고 거리를 행진한다. 이 외에도 경주에서는 경주 벚꽃축제, 경주 도자기축 제, 경주 한국의 술과 떡잔치 같은 문화 이벤트를 만날 수 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 안동민속축제 ​안동에 있는 하회마을에선 약 800년 전부터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국 가무형문화재 제69호인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탈놀이로, 조형미가 뛰어난 탈의 원본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오랜 역사와 큰 명성을 기념하여 안동에 선 1997년부터 탈춤을 주제로 한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축제기간에는 2019년 48회를 맞은 안동민속축제도 함께 열린다. 안동시에는 탈춤의 역사를 기념하는 안동탈춤공원도 있다.  경산 자인단오제(한장군놀이) ​단오는 조상들이 매년 음력 5월 5일을 기념하던 명절이었다. 우리나라 여러 지방에는 단오 풍속을 전승하는 축제가 열리는데 경상북도에선 경산에서 열리는 자인단오제가 유명하다.자인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다. 경북 경산 시 자인면 계정숲 일원에서 열리는 이 축제에선 단오굿, 전통 춤과 농악 공연, 단오 때의 풍속인 창포로 머리감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단오를 기념하는 축제는 또 있다. 울진군 평해읍 남대천에서 열리는 단오제가 그것인 데, 지역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와 큰줄 당기기 같은 전통 민속놀이 재현 행사 를 구경할 수 있다.     경상북도에는 크고 아름다운 산, 기름진 평야가 많이 있다. 또 여러 고장이 동해안을 끼고 있다. 이런 자연의 풍요로움은 다양한 특산품을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자연과 특 산품을 주제로 하는 축제들이 많이 열린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시작되는 내성천은 봉화-영주-예천을 지나 문경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은빛 모래사장을 끼고 맑은 물이 흐르는 내성천은 낙동강의 아름다운 지류 를 형성한다. 내성천이 흐르는 봉화군에선 자연과 생태를 두루 체험하고 은어잡이도 해 볼 수 있는 봉화은어축제를 매년 여름 열고 있다. 영주시 풍기 지역에서 나는 인삼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품이다.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영주시는 풍기인삼축제를 남원천 일대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다. 또 경북의 특산품 중에는 조선시대에 왕에게 진상했다는 역사가 전해 오는 특산품 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영덕의 대게이다. 오랜 유명세를 간직한 까닭에 오늘날에도 동 해바다와 접한 영덕군 강구항에서는 영덕대게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또 영덕군과 마찬가지로 동해안에 있는 울진군도 한국에서 유명한 대게 명산지이다. 이곳에서도 해마다 ‘울진대게와 붉은대게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과 다음 해 첫날인 1월 1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해넘이 와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경북에서 열리는 해맞이 행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포항 호미 곶에서 열리는 한민족해맞이축전이다. 이와 더불어 매년 여름이면 포항 형산강체육공 원 일대에서 펼쳐지는 포항국제불빛축제도 기억할 만하다. 낭만적인 기차여행 코스로 경북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봉화군에 있는 작고 아름다 운 간이역인 분천역에서는 매년 여름과 겨울에 산타마을축제를 열고 있다. 분천역을 중심으로 마을 일대에서 크리스마스와 관련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축제이다. 흔 히 크리스마스 하면 겨울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여름에도 진행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재미있다. 분천역에는 경북나드리열차,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 중부내륙관광열차 (O-train)가 정차한다. 영천시의 보현산천문대를 활용한 축제로서 별을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와 강연이 펼 쳐지는 영천 보현산별빛축제, 푸른 하늘로 솟구치는 다양한 연을 구경할 수 있는 의성 군의 의성세계연축제, 곤충을 주제로 한 예천세계곤충엑스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경북의 이색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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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봉산문화회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봉산문화회관

  봉산문화회관 ​언제 가든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감상 할 수 있는 봉산문화거리의 중심 건물 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인 건물 1 층에는 공연장, 2층에 공연장과 전시실, 3층에는 전시실과 수장고, 그리고 4층 에 강의실과 대구시 중구문화원이 자리 하고 있다. 모든 공연장, 전시관이 그러 하듯이 방문 전 홈페이지에서 현재 진 행 중인 행사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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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팔공산 올레길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팔공산 올레길

  팔공산 올레길 ​팔공산에선 봄에 벚꽃축제, 가을에는 단풍축제가 열린다. 천천히 걸어가며 팔공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면 팔공산에 조성된 올레길을 걸어 보는 것이 좋다. 8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는 올레길을 매주 1개 코스씩 8주에 걸쳐 걷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코스 곳곳 에 문화재가 많은데, 올레길 6코스 ‘단 산지 가는 길’에는 삼국시대 고분인 불 로동 고분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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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문화예술회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문화예술회관 1990년 문을 연 대구문화예술회관은 오랫동안 대구의 문화예술 1번지 역할을 해 온 곳으로 연중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이 열리고 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이 자리한 두류공원에는 단일 야외공연장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코오롱 야외음악당도 있다. 음악당 근처 두류 공원 산기슭에는 대구 출신 예술가들의 인물과 작품을 조각으로 표현해 놓은 인물동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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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수성못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수성못

  수성못 수성못페스티벌이 열리는 대구 대표 연못. 원래는 일제강점기 때 못 근처의 수성들판에 물 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인공 저수지였다. 또 수성못 언저리에는 수성들판을 배경으로 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이상화 시인 기념 조형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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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오페라하우스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오페라하우스

  대구오페라하우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가 열리는 곳이다. 굳이 공연을 보러 가지 않더 라도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곳은 아트 숍 (Art Shop), 주요 아리아 및 유명 클래식 음악 을 감상할 수 있는 오디오 룸(Audio Room), 대 구오페라하우스에서 제작한 역대 오페라 정보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오페라 아카이브(Opera Archive)와 같은 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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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주제로 하는 축제 & 저마다 개성과 즐거움이 있는 축제
자연을 주제로 하는 축제 & 저마다 개성과 즐거움이 있는 축제

 팔공산벚꽃축제매년 4월 팔공산에선 벚꽃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2019년 11회를 맞은 팔공산벚꽃축제는 팔공산 동화지구 분수대광장을 중심으로 열린다. 가장 즐거운 볼거리는 축제장~수태골 주차장 구간에 펼쳐진 벚꽃터널이다. 축제에는 벚꽃길 시민걷기대회 행사를 비롯해 야외 공연, 먹거리 부스, 플리마켓, 체험 부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있다.    비슬산참꽃문화제비슬산은 매년 5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대구의 명승지이다. 이곳에선 매년 4월 비슬산참꽃문화제가 열린다. 비슬산에는 전국 최대 규모인 약 30만 평의 참꽃 군락지가 있는데, 참꽃문화제는 이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잘 보존하고 또 즐겁게 감상하기 위해 열리는 축제이다.축제는 비슬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시작한다. 축제에서 가장 즐거운 볼거리는 해발 1,000m 지대에 있는 참꽃 군락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 외에 참꽃생활예술페스티벌, 참꽃가요제 등의 행사가 열린다.  안심창조밸리연꽃축제대구시 동구에 있는 안심 지역엔 광활하게 펼쳐진 연근단지가 있다. 연꽃의 뿌리줄기인 연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반야월 연근(꽃)단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선 해마다 연꽃이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8월에 연꽃축제가 열린다. 연근단지를 중심으로 연 생태관, 연 터널 갤러리, 점새늪 산책로, 금강역 레일 카페가 조성되어 있다. 연꽃축제는 반야월 연근(꽃)단지를 홍보하며 지역 주민들의 화합과 삶의 질을 높이고자 마련되었다.  금호강바람소리길축제경상북도 포항에서 발원하여 영천과 경산 지역을 거쳐 대구로 흘러드는 길이 118.4km의 금호강은 바람에 흔들리는 강변 갈대밭에서 ‘비파’ 소리가 나고 강물은 ‘호수’처럼 맑고 잔잔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대구시 북구가 주최하는 금호강바람소리길축제는 매년 9~10월경 금호강에 놓인 산격대교 일대에서 열린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서 다양한 장르의 문화 공연과 체험 행사를 즐길 수 있다.    소원 풍등 날리기2019년 4월 27일 대구시 달서구 두류운동장에선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3000여 개의 풍등이 두둥실 하늘로 올라갔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기 위한 달구벌 관등 놀이의 일부인 ‘소원 풍등 날리기’는 참가자들이 각자의 소망이 담긴 풍등을 하늘에 날리는 행사이다.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대구의 여름은 덥기로 유명하다. 이런 환경적 요인을 긍정적인 축제로 승화한 것이 바로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이다. 호러(공포)라는 장르를 이용해 더위도 식힐 겸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색 축제이다. 매년 8월 대구스타디움 시민광장, 대구 시내 소극장 등에서 호러를 주제로 한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대구국제바디페인팅페스티벌바디페인팅(Body Painting)은 몸을 캔버스로 하여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대구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바디페인팅을 주제로 한 국제바디페인팅페스티벌이 열리는 도시이다. 바디페인팅대회뿐만 아니라 환상적인 의상과 장식품의 조화로 화려함을 뽐내는 환타지 메이크업 어워드 행사도 볼 만하고, 네일아트 등 뷰티 관련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익한 강의도 진행된다. 매년 8월에 열리는 축제이다.      대구국제패션문화페스티벌섬유산업도시 대구, 패션도시 대구의 명성과 전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 매년 가을에 열리는 축제이다. 2019년 행사는 수성못 옆 상화동산에서 열렸는데 많은 디자이너들의 패션쇼, 패션아트 전시회, 설치미술 전시 등의 행사가 열렸다.   수성못페스티벌 & 수성빛예술제대구시 수성구의 대표 축제로 매년 가을 수성못에서 호수와 물을 주제로 펼쳐지는 축제이다. 2019년 수성못과 두산오거리 일원에서는 제1회 수성빛예술제가 열렸다. 또 음식거리로 유명한 수성구 들안길에서는 가을에 들안길 푸드페스티벌이 열린다.   대구치맥페스티벌매년 7월 두류공원에선 치킨과 맥주를 주제로 하는 치맥페스티벌이 열린다. 대구는 한국에 널리 알려진 유명 치킨 회사가 여러 개 생겨난 도시인데, 이 전통에 부합하는 대구치맥페스티벌은 1회 행사 때부터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다.   대구에선 또 이런 축제들이 열린다!대봉교 아래 신천둔치에서는 가을에 대구 출신의 가수인 김광석을 추모하는 ‘김광석 나의 노래 다시 부르기 대회’가, 대구 최대 시장인 서문시장에서는 매년 가을 서문시장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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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주제로 하는 축제
대구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주제로 하는 축제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 ​매년 5월 대구시 중구 남성로에 있는 대구 약령시 거리에서 열리는 축제다. 조선 중기 에 생긴 대구 약령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약재시장이다. 이 축제 의 목적은 대구 약령시의 긴 역사를 기념하고 앞으로도 발전을 이어 나가는 데 있다. 축 제 현장에서는 한방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마련되어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경상감영 풍속 재현 행사 ​해마다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에 경상감영공원을 찾으면 조선시대 경상 감영에서 행해지는 전통의식 재현 행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행사는 오후 2시 종이나 북을 두드려 시간을 알려 주는 군사들의 행진으로 시작되는데, 조선시대에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도심의 중심거리에 설치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이어서 경상감영 문을 지키는 수문장 교대의식, 취타대 공연, 전통무예 시범 등의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조선시대 전통복식을 입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 외에 다양한 민속놀이도 체험할 수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 ​대구를 다른 도시와 구분지어 주는, 대구만의 도시 브랜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구 시의 슬로건인 ‘컬러풀 대구’에 잘 나타난다. 영어 표현 ‘Colorful’의 뜻 그대로 대구는 ‘알 록달록하고, 다채롭고, 색채가 풍부한 도시’ 라는 것이다. 즉 대구가 다양성, 활력, 열정, 에너지를 가진 도시라는 말이 된다.​이 슬로건에 어울리는 축제가 매년 5월 대구 도심에서 열리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이 다. 축제의 가장 흥겨운 볼거리는 ‘컬러풀 퍼레이드’로, 시민 누구나 참여하고 즐기는 거 리 행진 프로그램이다. 경연으로 진행되는 이 퍼레이드가 펼쳐질 때면 화려한 의상과 분장을 한 형형색색의 물결이 도심을 수놓는 장관을 만끽할 수 있다. 퍼레이드 외에도 컬러풀 거리예술제, 컬러풀 장터도 축제의 흥미를 더하는 요소들이다.    동성로축제​​대구를 대표하는 거리인 동성로에선 매년 5월 동성로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 동안 다양한 공연과 체험행사가 펼쳐지는데, 1990년에 시작되어 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 다. 해마다 열리는 축제에는 그때그때 슬로건을 정하게 되는데, 2019년의 경우에는 ‘대구 살아있네! 동성로 살아있네!’였다.​2019년 동성로 거리에선 이 외에도 대구를 대표하는 게임 축제인 대구글로벌게임문화축제(e-Fun 2019),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을 겸한 성탄 기념 축제도 열렸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뮤지컬은 노래, 무용(춤), 드라마로 이루어진 종합예술이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대중 의 사랑을 얻고 있는 예술 장르로서, 대구에선 2006년부터 매년 가을, 국내 최대 규모 의 뮤지컬 축제인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DIMF는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국제 뮤지컬 축제로, 해외 초청 작품, 국내 창작 뮤 지컬 등 20편이 넘는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외에 개막 축하 공연, 폐막 행사 (DIMF 어워즈), 시민 참여 프로그램 등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주 공연장인 대구오 페라하우스 외에 두류공원의 코오롱야외음악당, 동성로, 수성못에서도 관련 행사가 펼쳐진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소개된 후 대구는 한국의 서양음악 발전에 중요한 도시 구 실을 해 왔다. 그러한 도시답게 대구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오페라단이 있다는 것, 게다가 2003년 국내 최초의 오페라 전용 극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 이 아니다. 이처럼 대구라는 도시가 지닌 서구 음악의 전통과 훌륭한 공연 인프라는 대구국제 오페라축제를 여는 탄탄한 기반이다. 축제 기간 중에는 오페라하우스 공연 외에도 소극 장과 야외에서 열리는 미니 오페라 콘서트, 실내악 공연과 수상음악회 등이 관객의 귀 를 즐겁게 한다.    대구사진비엔날레 비엔날레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 전람회를 말하며, 대부분 미술 전람회의 성격을 갖 고 있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특이하게도 사진 분야의 비엔날레가 2년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 20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사진예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도시답게 현재도 여전히 그 예술적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대구사진비엔날레는 달서구에 있는 대구문화예술 회관에서 열리는데, 2018년의 비엔날레에는 유료 관람객 1만 5000여 명을 포함해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봉산미술제​ 대구에는 전국의 미술가들에게 잘 알려진 미술 거리가 있다. 대구 도심에서 가까운 봉산문화거리이다. 이곳에는 현재 20여 개의 화랑을 비롯해 미술 관련 시설이 많이 들 어서 있다.​1993년부터 매년 10월 개최되고 있는 봉산미술제 축제 기간 중 봉산문화거리 내 갤 러리에서 일제히 전시회가 열리고, 봉산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미술품 경매 이벤트도 선을 보인다.꼭 축제 기간이 아니어도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봉산문화거리는 한번 찾아볼 만한 공간이다. 봉산문화회관과 인근 갤러리에서 연중 내내 열리는 전시회를 관람하면 서 일상의 여유와 문화의 향기를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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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과거도 정복했다! 신라의 세 천재
당나라 과거도 정복했다! 신라의 세 천재

  신라 부흥을 위해 노력한 천재 최치원 ​868년 12살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난 최치원. 당나라에서 그는 외국인 학생 을 대상으로 치르던 ‘빈공과’라는 과거에 합격해 당나라 관료로 근무했다. 신라 귀국 후 에는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진성 여 왕에게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그 후 벼슬을 포기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은둔생활을 했다.   최승우, 후백제 견훤의 신하가 되다 ​최치원·최언위와 함께 3최로 불린 최승우 또한 890년 당나라로 유학해 893년 빈공과  에 급제했다. 하지만 그는 최치원처럼 귀국 후 신라를 위해 애쓰지 않았다. 정치가 혼란  한 신라 수도 경주로 돌아가지 않고 후백제 견훤의 신하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새 나라 고려의 발전에 힘쓴 최언위 ​최언위는 885년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합격한 후 909년 신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라는 머지않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고려에 통합(935년)되고 만다. 이때부 터 그는 고려의 왕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 후에 여러 벼슬을 하면서 새 나라 고려의 발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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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물에 담긴 실크로드 문명의 빛
신라 유물에 담긴 실크로드 문명의 빛

실크로드는 고대 동양과 서양이 문명 교류를 하던 길이다. 중국의 중원 지방에서 시 작해 타클라마칸사막,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 초원지대, 이란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쪽 에 이르는 길이 약 6,400km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출 토된 유물과 비슷한 것이 여럿 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누가, 언제, 어떻게 경주와 실크 로드를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가 실크로드 문명과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몇 가지 유물에서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출토 황금보검​1973년 경북 경주 대릉원 동쪽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 여러 개의 무덤이 드러났다. 그중 14호 무덤에서 120여 점의 신라시대 유물이 나왔다. 출토 유물 중에서 가장 눈길 을 끈 것은 화려하고 정교하게 세공한 길이 36cm의 황금보검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신라 자체의 생산품이 아니라 수입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놀라 운 사실은 경주에서 약 5,000km 떨어진 옛 실크로드 지역, 곧 지금의 카자흐스탄에서 도 경주의 황금보검과 매우 유사한 검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경주 98호 남쪽 무덤 출토 유리그릇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신라 무덤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문화재 중에 는 유리로 만든 병과 잔도 있다.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으로 명명된 이 유물들은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유리의 질, 형태, 색깔이 흔히 로만글라스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이 유물 역시 신라가 실크로드 지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송림사 전탑 출토 유리사리병과 금동사리기 ​대구에서 가까운 경북 칠곡군 동명면에 송림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다. 1959년 절에 있는 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높이 6.3cm의 녹색 유리사리병과 이것을 보관하는 금 동사리기가 나왔다. 금동사리기는 정교한 세공기술로 눈길을 끌었고, 사리기에 모셔진 녹색의 유리사리병은 한반도에서 나온 사리함 중 유일하게 유리로 만든 것이라 더 큰 주목을 끌었다. 이 유리사리병 역시 신라와 실크로드의 문명 교류를 증언해주는 것이 었다. 보물 제325호인 이 금동사리기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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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공부를 위해 당나라로 향한 승려들
불법 공부를 위해 당나라로 향한 승려들

  벼슬을 마다하고 불교 공부에 힘쓴 자장590년 신라의 귀족 집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청년 시절부터 불교 공부에 심취한 그는 자장이라는 법명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왕은 자장이 똑똑한 것을 알고 그를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장은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워낙 출중한 인재였기에 스님으로서 그의 명성은 머지않아 널리 퍼졌고, 당나라 황제마저 그를 공손하게 대접할 정도로 탐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자장 같은 인재가 신라를 위해 일해 줄 것을 바란 선덕여왕은 당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자장을 놓아 달라며 부탁을 하게 된다.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왕에게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탑을 세우자고 제안해, 황룡사구층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또 진덕여왕 때에는 당나라의 연호와 복식제도를 도입하자고 건의해 시행되도록 하였다.   의상, 당에서 돌아와 신라에 절을 세우다자장에 이어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또 한 사람의 승려가 바로 신라 불교를 크게 발전시킨 의상이었다. 625년에 태어나 19살에 승려가 된 그는 당나라 유학을 떠났지만 그의 첫 유학길은 신라·고구려 국경에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히며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의상은 당나라로 가서 8년간 공부하고 귀국을 결심했는데, 그때 그는 걸음을 몹시 재촉해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당나라의 신라 침략 계획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돌아온 이후 그는 젊은 승려들을 가르치고 신라 백성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신라 땅 곳곳에 많은 절을 세워 나갔다. 그 중 특히 유명한 사찰이 바로 676년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세운 부석사이다.     중국을 넘어 인도를 여행한 혜초혜초는 소년 시절인 719년에 당나라로 불법 공부를 떠났다. 중국에서 인도 출신 승려로부터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를 배웠고, 그 영향으로 인도 여행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불교 성지를 둘러보고 밀교 공부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723년경 마침내 혜초는 인도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4년 동안 인도를 비롯해 중앙아시아 지역들을 여행하며 자신이 본 것을 『왕오천축국전』으로 남겼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온 혜초는 불경을 번역하고 불교 진리를 탐구하다가 787년 중국땅에서 입적했다. 혜초의 인도 여행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와 관련한 대단히 희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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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 ​계산성당 서쪽 청라언덕에는 미국 선 교사들이 지낸 집이 몇 채 보전되어 있 다. 20세기 초 대구에 기독교를 전파 한 이들의 집이었는데, 이 중 두 건물에 의료박물관과 선교박물관이 들어서 있 다. 의료박물관은 1800~1900년대 시 기의 의료기기들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선교박물관에서는 각종 성경 과 선교 유물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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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녹동서원 & 한일우호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녹동서원 & 한일우호관

  녹동서원 & 한일우호관김충선을 추모하는 녹동서원은 대구시 달성군에 있다. 2012년 녹동서원 한 편에 한일우호관이라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침략 전쟁을 반대한 김충선의 정신을 기억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우호와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세운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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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모명재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모명재

  모명재두사충은 조선에 살면서도 명나라를 잊지 않았다. 자기의 호를 ‘모명(慕明)’ 이라고 지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모명재는 두사충의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뽕나무골목에서 멀지 않은 반월당역에서 대구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담티역에 내리면 그 근처에 모명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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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계산성당 & 뽕나무골목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계산성당 & 뽕나무골목

  계산성당 & 뽕나무골목계산성당은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외부인들도 많이 찾는 대구의 명소이다.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후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이 살았던 뽕나무골목은 계산성당 바로 뒤에 있는 아담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두사충 외에 대구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서상돈, 이상화 같은 인물이 살았던 집들도 잘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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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 약령시 & 한의약박물관
[교실 밖 대구역사체험] 대구 약령시 & 한의약박물관

  대구 약령시 & 한의약박물관대구 약령시는 남성로에 715m 길이로 펼쳐져있다. 이 거리에 자리한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은 1985년 문을 연 곳으로, 약령시의 역사와 한의학 지식을 두루 체험할 수 있다. 박물관은 2층 한방체험실, 3층 한방역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한방역사실에 가면 대구 약령시의 유래와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약령시 역사와 문화 ZONE’이 있다. 이곳을 자세히 둘러보면 약령시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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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이 보여준 사랑과 헌신의 생애
이방인들이 보여준 사랑과 헌신의 생애

우드브리지 존슨젊은 선교사로 한국을 찾은 미국인 우드브리지 존슨은 1899년 대구 약령시장 근처에 제중원을 설립했다. ‘많은 사람들을 구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인 제중원은 대구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의료 기관이었다. 1899년 개원한 이후 제중원은 1901년까지 약 2000여명의 환자를 보살폈으며, 환자가 더 늘어남에 따라 1903년 대구시 중구 동산동으로 이전했다. 제중원이 동산기독병원(현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의 전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11년이었다.  아서 맥타가트아서 맥타가트는 1953년 미국 국무부 산하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76년 국무부에서 퇴직한 그는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97년 퇴임할때까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월 30만 원 안팎의 최소 생활비로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과 연금을 모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버스비까지 아끼려고 먼 거리를 걸어다니며 모은 돈은 제자 200여 명의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영남대학 인문관 1층 로비에는 그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흉상이 있다.   엠마 프라이싱거1961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수녀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당시 29세였던 그 수녀의 이름은 엠마 프라이싱거였다. 프라이싱거 수녀는 이때부터 50년이 넘도록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한센인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가톨릭피부과의원을 세워 의술을 베풀었다. 프라이싱거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한센포럼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프라이싱거 수녀에게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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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거리 곳곳에 스민 화교들의 전통과 문화
종로 거리 곳곳에 스민 화교들의 전통과 문화

   로베르 신부와 대구의 천주교인들이 힘을 모아 계산성당을 다시 세울 때 함께 일한 외국인들이 있었다. 바로 중국인 벽돌공사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은 계산성당 외에도 당시 대구에 하나둘 들어서던 서양식 건물 건축에 참여했다. 대구에 중국인들의 정착이 시작된 때는 1905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철도가 개통된 시기부터였다. 말하자면 대구 화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인데, 화교란 중국이나 타이완(대만) 국적을 지닌 채 외국에 정착해 사는 중국인을 가리킨다. 대구에 둥지를 튼 화교들은 건축 외에도 여러 분야에 종사했다. 양조장이나 벽돌공장, 음식점 등 업종도 다양했다. 그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중국 고유의 풍속과 전통을 지켜 나가면서 대구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에 화교들은 대구의 중심가였던 종로 거리에 많이 모여 살았다. 1907년 대구읍성이 완전히 철거되고 난 후 이 거리에 들어선 많은 상점들 중에는 중국인 가게가 많이있었다. 오늘날 종로 거리에서는 해마다 ‘대구화교중화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대구에 정착한 중국인의 역사와 그들의 전통문화를 기념하는 행사로 거리 퍼레이드에서 중국 전통춤인 사자춤, 용춤을 구경할 수 있다. 지금도 대구에는 1905년 이주를 시작한 중국인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종로 거리에 가면 중국인 학생들이 공부하는 대구화교소학교를 볼 수 있다. 화교들 가운데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이들의 가게 중엔 대구의 맛집으로 소문난 곳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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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초의 성당을 세운 벽안의 프랑스 신부
대구 최초의 성당을 세운 벽안의 프랑스 신부

   두사충이 정착한 동네인 계산동에 1899년 대구 최초의 성당이 들어섰다. 프랑스 출신의 로베르 신부(한국 이름 김보록)가 세운 계산성당이었다. 불운하게도, 애초에 한국식 목조 건물로 지어진 성당은 지은 지 2년쯤 되어 화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일로 로베르 신부가 낙담해 의욕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 성당을 다시 세웁시다. 돌과 벽돌로 더 튼튼하게 지읍시다.” 신부의 말에 교인들 역시 “저희 신자들도 건축비를 보태겠습니다.”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새로 짓는 성당의 설계와 공사 감독은 로베르 신부가 직접 맡았고, 공사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기술자들도 참여했다. 마침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가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 완공되었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축성식은 다음해인 1903년에 열렸는데, 조선 각지의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대구 지역 일반 주민들까지도 구경을 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는 마치 흥겨운 잔칫날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대구는 조선에서 비교적 일찍 천주교가 보급된 도시였다. 1911년 대구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한 후 계산성당은 경상도 천주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100년을 훌쩍 넘긴 성당 건물은 현재 국가 지정 사적지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성당의 정원에 가면 로베르 신부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흉상 조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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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은 달랐으나 조선인으로 생을 마치다
태어난 곳은 달랐으나 조선인으로 생을 마치다

  우록동에 정착한 일본인 장수 사야가(김충선)1794년(정조 18)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우록동에 녹동서원이 들어섰다. 김충선이라는 사람을 추모하는 서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김충선이 원래는 일본 출신의 장수였다는 사실이다. 서원이란 곳은 훌륭한 유학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우는 건데 어떻게 이런 일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 침략군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던 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의 우선봉장이 사야가라는 장수였는데, 어릴 때부터 일본에 유학을 전해준 조선의 문화를 흠모했던 그였기에 일본의 조선 침략이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사야가는 조선에 도착한 후 자신의 신념에 따랐다. 뜻을 같이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한 것이다. 이후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전쟁때 큰 공을 세운 그에게 조선의 왕 선조는 직접 새 이름을 내려주며 공로를 치하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사야가가 아닌 김충선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김충선은 대구 우록동에 정착했다. 그 후로도 그는 여러 번 장수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의 북쪽 국경을 지키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에 맞서 조선을 지키고자 앞장서서 싸웠다. 그 후 김충선은 1642년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우록동 주민에게 유학을 보급하는 일에 전념했다. 무사로 태어나 선비로 생을 마감한 김충선을 위해 조선의 유학자들은 출신 국적을 따지지 않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녹동서원은 그런 마음으로 세워진 곳이다.     명나라 출신 계산동 주민, 두사충임진왜란이 일어나 위기에 빠진 조선이 원군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이여송에게 5만여 지원군을 주어 조선으로 파견한다. 이여송의 휘하 장수 가운데 두사충이라는 인물이있었는데, 그가 맡은 주 임무는 지형을 잘 살펴서 진지를 설치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두사충이 대구에 처음 발을 내딛은 것은 남쪽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과 명나라의 군대가 연합작전을 벌였을 때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그는 풍수지리에 밝은눈으로 대구의 지리를 살폈을 터이다. 아마도 그때 대구의 산과 강, 들판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구라는 곳, 사람이 살기에 참 좋은 땅이로구나!’ 임진왜란 동안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 진린을 도와 조선의 승리에 힘을 보탰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남기로 결심하자 그의 공적을 인정한 조선정부도 대구에서 가장 좋은 땅을 내주며 두사충의 정착을 지원했다. 그 후 10년도 되지 않아 1601년 그 자리 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두사충은 새로이 계산동에 집을 짓고 이사해 거기에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집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지금도 계산동에는 뽕나무골목이라고 부르는 장소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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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와 교류하는 세계의 도시들
대구와 교류하는 세계의 도시들

  대구시는 1981년 미국 애틀랜타시를 시작으로 여러 도시와 자매도시 사이가 되었다. 대구시는 현재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남미와 아시아권의 여러 나라들과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자매도시는 도시 간에 문화를 교류하고 그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 친선관계를 맺은 도시를 뜻한다. 자매도시가 행정적 결연체제를 맺은 상태라면 우호협력도시는 그 전 단계이다. 대구공항에 처음으로 여객기가 취항한 것은 1961년이었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국내선이 전부였다. 그러나 1996년 오사카행 국제선이 개설되면서 대구공항은 국제공항이 되었고, 지금은 국내에서 다섯 번째로 이용객이 많은 공항이 되었다. 현재 대구에서 취항하고 있는 국제 노선은 많다. 중국 노선으로는 상하이, 베이징, 선양 등이 있고 일본쪽에는 도쿄, 오사카, 삿포로, 오키나와, 가고시마, 구마모토 등에 취항한다. 동남아 노선에는 홍콩, 마카오, 타이베이, 방콕, 세부, 하노이 등이 있으며, 이 외에 러시아 2개 노선과 괌 노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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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대구

   2007년 3월 27일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대구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구가 제 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 도시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케냐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집행이사회의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경쟁 도시인 모스크바(러시아), 브리즈번(호주) 등을 제치고 선정된 것이다. 당시 대구 시민이 보여준 적극적인 지지는 대회 유치에 커다란 동력이 되어 주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올림픽,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꼽힌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을 개최한 적은 있지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치른 경험은 없었다. 따라서 대구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 성공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3대 스포츠 이벤트 모두를 개최한 일곱 번째 나라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 2011년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펼쳐진 이 스포츠 제전에는 203개국에서 1,945명(남자 1,046명/여자 899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이처럼 큰 대회다 보니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에 많은 이들의 참여가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6개의 색깔로 구분된 유니폼을 입고 이틀에 한 번, 하루 8시간씩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학생, 직장인, 주부를 포함해 참으로 많은 대구 시민과 타 지역민까지 합세한 스포츠 축제였다. 대회는 이처럼 국민적인 협조 속에서 대구스타디움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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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 더 가까워진 두 도시의 인연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 더 가까워진 두 도시의 인연

  2020년 3월 4일, 대구에서 출발한 구급차가 광주광역시에 있는 빛고을전남대병원에 들어섰다. 구급차에는 대구 지역 코로나19 경증 감염자들이 타고 있었다. 구급차가 도착한 병원에서는 인근의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광주와 대구는 달빛동맹을 맺은 형제입니다. 여러분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달빛동맹’이란 2013년 광주시와 대구시가 서로 교류・ 협력을 활발히 하자며 맺은 협약의 명칭으로 ‘달빛’의 ‘달’은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에서, ‘빛’은 광주의 우리말 이름인 빛고을에서 따온 것이었다. 달빛동맹이 만들어진 후 두 도시는 상호협력, 교류행사를 보다 활발하게 이어 오고있다. 대구에서 열린 2・ 28 민주운동 기념식에 광주시장이, 광주에서 열린 5・ 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는 대구시장이 참석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함께 되새겼다. 이런 상징적인 왕래 말고도 시민들 사이에선 보다 긴밀한 교류가 활발히 펼쳐졌다. 대구와 광주 시민들이 상대 도시의 명산인 무등산과 팔공산을 서로 방문해 본다든가, 두 도시의 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을 교환 전시하는 식이었다. 2020년에 들이닥친 코로나19 위기는 두 도시의 인연을 더 가깝게 해준 계기였다. 3월에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대구에 병상이 부족해지자 광주시가 대구 환자 32명에게 광주의 병상을 내어 준 것이다. 이 시기에 광주시의사회는 달빛의료지원단을 구성해 대구를 찾기도 했다. 당시 광주에서 치료받은 대구 코로나 확진자들은 완치되어 무사히 귀가했다. 환자와 가족들은 편지와 성주참외 등의 선물을 보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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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대구에서 최초로 담장허물기운동이 시작되다
1996년, 대구에서 최초로 담장허물기운동이 시작되다

    1996년 10월 어느 날, 대구시 서구청에서 이상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해머 등을 든 인부들이 담장을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본 주민 대부분은 “멀쩡한 담을 왜 허물어?”, “새 담장을 세우려나? 쓸데없는 예산 낭비 아니야?” 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새 담장은 들어서지 않았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서구청에는 담장이 없다. 담장이 있었던 자리엔 나무와 꽃과 분수대, 벤치 같은 시설이 들어서 있을 뿐. 그리고 하나 더! ‘이곳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담장허물기운동이 시작된 곳’임을 알리는 표지도 함께 서 있다. 1996년 당시만 해도 공공기관 건물은 여느 건물보다 튼튼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96년 대구에서는 행정기관, 시민단체 등 115개 기관과 단체가 참여한 민관협의체인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가 뜻을 모아 담장허물기운동을 추진했다. 서구청을 시작으로 한 대구의 담장허물기사업은 우려와 달리 금세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멀쩡한 담을 허무는 게 예산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대구 도심에 있는 경북대학병원 등 여러 건물의 담장들도 하나둘 사라져갔고, 민간의 아파트 단지 풍경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이렇게 퍼져 간 담장허물기운동의 결과, 시작한 지 20년이 지나자 대구에서 사라진 담장의 길이는 약 30km에 달했다. 대구가 일군 성과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대한민국 여러 도시의 공무원들이 대구로 견학을 왔다. 관심은 곧 해외로도 번져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공무원들도 견학을 위해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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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8도 상인들이 와글와글~
조선 8도 상인들이 와글와글~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약재를 편히 사고팔 수 있도록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약령시장을 여는 것을 윤허(허락)하노라!”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의 통치 시절(1658)에 내려진 결정이다. 이를 계기로 경상감영북문 근처의 뜰에는 봄, 가을마다 한 달간 약령시가 열리게 되었다. 각종 약재를 교환하거나 사고파는 시장인 약령시의 설립을 허가함으로써 대구에는 조선 최대의 약재시장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경상도에 속해 있던 의성, 영천, 합천, 봉화, 영양, 안동, 상주 등은 예로부터 좋은 한약 재료가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또 대구는 낙동강과 금호강에 접해 있어 약재 등 각종 상품을 배로 수송하기가 편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도 대구 약령시의 발전을 도왔다. 대동법(백성들이 세금으로 내던 공물인 지방 특산물을 쌀로 대신한 제도)이 실시되고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인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는 등 상업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덕분에 대구에서 거래되는 약재의 양이 빠르게 늘어났고, 대구 약령시도 조선 최대의 약재시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약령시가 열리는 기간이면 경상감영 주변은 조선 8도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붐볐고, 약령시 주변에 있는 객주(식당 겸 숙박 시설)도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조선 최대 규모인 대구 약령시의 명성은 국경 너머 중국까지 알려졌다. 인삼 등 조선이 자랑하는 약재를 구입하려는 중국 상인들까지 대구를 찾았고, 약령시에서 거래된물건이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으니, 말하자면 약재를 거래하는 ‘글로벌 시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여러 지방이나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 이런저런 정보도 주고받게 되므로 대구가 약재뿐만 아니라 정보의 교류가 이뤄지는 도시가 된 것은 물론이다. 1908년 대구 약령시장이 남성로로 자리를 옮긴 후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는 약령시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일제의 거래 제약 조치로 수난을 겪은것인데, 대구의 약재 상인들은 이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인내하며 전국 최고 약령시장의 전통을 지켜냈다. 약령시장 상인 중에는 장사로 모은 돈을 독립자금에 보탠 사람들도 있었다. 대구 약령시의 유명세는 지금도 여전하다. 2001년 한국기네스위원회는 300년 역사를 훌쩍 넘긴 대구 약령시장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로 인증했다. 또 2004년에는 정부가 한방 관련 분야 최초로 한방특구로 지정하는 경사도 따랐다. 오늘날에도 한약상이 즐비한 남성로 거리에선 매년 5월 ‘대구 약령시 한방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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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경상북도의 두 도시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경상북도의 두 도시

   대한민국 최대 내륙 산업도시 구미구미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진 곳이 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했던 구미는 길재, 김숙자, 장현광 같은 유명한 역사 인물을 배출하였다. 구미는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도시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금오산은 ‘작은 금강산’이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아름다운 산이며, 도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낙동강의 유명세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 4대 하천의 하나가 아닌가.현대에 들어 구미는 산업도시로서 확고한 명성을 다지게 된다. 1970년대 초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에 맞춰 구미에는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특히 구미산업단지에는 전기, 전자 계통의 기업들이 많이 입주했고, 이후 국내 최대의 산업단지로 성장해 왔다. 그동안 구미는 한국 경제 역사에서 놀라운 성과를 쌓았는데, 1999년 전국 단일 공단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어 2005년에는 수출 300억 달러를 달성하게 된다. 지금도 구미산업단지는 한국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5공단으로 나뉜 국가산업단지에 3200여 개 기업체가 가동 중이며, 근로자 수는 10만여 명에 이른다. 구미가 전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 경북 수출에선 63%에 이른다. 구미는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답게 나무가 많은 푸른 도시이기도 하다. 2010년 4월 전국 최초로 ‘탄소제로 도시’를 선언한 구미는 2005년부터 1000만 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전개해 2015년에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포항, 제철산업의 세계 제일 도시포항은 경상북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다. 2020년 기준 51만 2578명. 경상북도 동해안 영일만에 위치한 포항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과 수산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포항이 산업도시로 도약한 것은 1970년대에 포항종합제철(현재의 포스코)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후 포항은 세계적인 제철산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산업 발전과 더불어 포항의 인구는 늘어났고 문화와 교육도 거듭 발전해 왔다. 특히 1986년 포항제철이 국제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목표로 설립한 포항공과대학(POSTECH)은 단시간에 한국의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하였다. 오늘날 포항은 제철산업 외에도 2차전지 등 여러 첨단 산업이 발전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등 과학 기술 연구소도 많다.경북 최대 도시 포항은 다양한 축제의 도시로도 유명한데, 포항국제불빛축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같은 행사들이 그것이다. 멋진 명소들도 도시의 멋을 더하는 데 한몫한다.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도시 곳곳에 있으며, 한반도에서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장소인 호미곶, 높이 930m의 내연산,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 등 명소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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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된 경상북도
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된 경상북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엔 기록유산이 있다. 세계적 보존 가치가 있는 책, 문서, 편지등의 기록물을 세계유산으로 정한 것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기록유산 중에는 1970년부터 한국에서 추진된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도시 중심의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농촌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지시하였다. 여기에서 잘 사는 농촌을 만들기위한 운동인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구상한 것은 1969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8월 박대통령은 수해를 입은 경남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기차가 경상북도 청도군을 지날 때 대통령은 청도군의 신도마을 주민들이 제방 복구와 마을길을 보수하는 모습을 보고 열차를 정차시켰다. 대통령은 마을 주민들에게서 “기왕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좀 더 잘 가꾸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루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일은 대통령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이듬해인 1970년 대통령은 신도마을처럼 주민들의 협동정신으로 더 좋은 마을을 만드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것을 지시하였다. 전국 농촌에서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모습을 현대식으로 변화시켰고, 농촌지역 소득증대에 도움을 주었다. 또 근면, 자조(발전을 위해 스스로 노력함), 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직장과 도시에도 보급되어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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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에서는 특별한 나무가 자란다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특별한 나무가 자란다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군요.” 1999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런 요청을 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곳이라면 한국의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곳이어야 했다. 영국 여왕에게 보여줄 가장 한국적인 곳이 선정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하회마을이었다. 안동에 온 여왕은 하회마을을 구경했다. 하회마을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탈춤인 하회탈춤 공연도 관람했다. 여왕은 하회마을에 있는 옛집 중 하나인 충효당의 마당에 방문 기념으로 구상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나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영국 여왕에게 자랑할 만큼 가장 한국적인 곳인 하회마을은 어떤 곳일까?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풍산 류씨들이 살아온 마을이다. 낙동강이 마을의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 도는 명당에 자리 잡은 마을로,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 데 헌신한 재상인 류성룡을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에 있는 옛집인 양진당과 충효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마을 전체는 201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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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을 만나려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을 만나려면?

1971년 안동에 있는 신라시대 절인 봉정사에 있는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에서 귀중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25년 극락전을 보수할 때 만들어진 문서였는데, 거기엔 봉정사와 극락전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시대인 공민왕 12년(1363) 극락전을 중창(낡은 건물을 고쳐 다시 지음)하였다는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극락전 건물이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세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 써 극락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어있다. 경상북도 영주에도 아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있다. 부석사에 있는 무량수전이다(국보 제18호). 부석사는 봉정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신라 의상대사가 왕의 명령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창건연대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크다. 특히 무 량수전을 떠받치는 나무 기둥이 배흘림기둥인 것이 이색적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3분의 1쯤 되는 부분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보이게 한 것을 말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옆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감탄이 나온다! 눈앞에 산줄기가 시원시원하게 뻗어있는 소백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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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번째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은?
한국의 첫 번째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은?

  경주에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먼저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인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땅 위에 건축으로 풀어 낸 절이라 할 수 있다.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만들고 여기에 전각과 탑을 세웠는데, 특히 자연석과 다듬은 돌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축대는 우리 전통건축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영역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과 석가탑 등이 있는 구역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등이 있는 구역으로 나뉜다. 국보 제23호 청운교와 백운교는 정교하고도 화려하며, 석가탑(국보 제21호)은 완벽한 균형미와 장중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또 다보탑(국보 제20호)은 나무를 조각하듯 돌을 화려하고도 세밀하게 다듬은 솜씨가 걸출하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같은 해에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했는데, 그의 사후 혜공왕 10년(774)에 완공되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석굴이다. 긴 네모꼴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 등 조각의 아름다움도 탁월하며, 시설훼손을 막기 위한 공기순환장치 등 과학적인 설계도 빼어나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 되어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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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 경주는 2000년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사를 맞았다. 신라 천년(BC 57~AD 935)의 옛 수도로서 수많은 유적이 잘 보존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불교미술이 빛나는 남산지구, 옛 왕궁 터인 월성지구, 왕릉 분포 지역인 대릉원지구, 신라 최대 사찰 유적지인 황룡사지구, 경주 방어용 산성이 자리한 산성지구, 이렇게 5개 지구로 구성된다. 이 안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국보, 보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월성지구와 대릉원지구를 사례로 문화재 분포를 살펴보자.  월성지구신라의 왕궁이 있었 던 월성,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전설이 전해 오는 계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인 첨성대, 통일신라시대에 월지 서쪽에 있던 궁궐 건물인 임해전 터 등이 있다.  대릉원지구신라의 왕, 왕족, 귀족 계층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대릉원 안에는 황남대총, 천마총을 비롯한 23개의 고분이 있다. 이 지역 무덤의 발굴 조사에서 신라 문화와 기술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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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반야월 연근(꽃)단지
[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반야월 연근(꽃)단지

  반야월 연근(꽃)단지대구도시철도 1호선을 타면 갈 수 있는 반야월 연근(꽃)단지는 전국 최대 연근 생산지이다. 또 7~8월이 되면 드넓은 연밭에 피어난 연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대구의 명소이기도 하다. 이맘때 대구시 동구가 주최하는 연꽃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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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평광 왕건사과마을
[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평광 왕건사과마을

   평광 왕건사과마을대구시 동구 평광동에 있는 평광 왕건사과마을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사과 재배지이다. 왕건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이곳이 왕건과 견훤의 팔공산전투가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과 농사를 지은 역사는 약 100년이나 되었다. 사과마을은 4월 말 사과꽃이 필 때 특히 아름답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평광왕건사과’는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마을 근처엔 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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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도동 측백수림
[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도동 측백수림

 도동 측백수림천연기념물 제1호인 측백수림은 대구시 동구의 도동마을에 있다. 측백나무들은 불로천 상류 지역의 절벽에 자라고 있는데, 절벽에서 자라는 나무들 중 약 80%가 측백나무이다. 측백나무가 자라는 절벽 근처에는 신라시대에 지은 절인 관음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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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도동서원
[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도동서원

 도동서원도동서원은 달성군에 있는 구지면 사무소에서 약 4km 거리에 있다. 서원 입구에는 도동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을 입증하는 표지석이 있다. 잘 보존된 옛 건물들 사이로 난 흙길도 아담하면서 푸근하다. 서원 입구에 있는 수령 약 400년의 은행나무도 도동서원의 명물이다. 서원에서는 옛 과거시험 재현 등 여러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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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DTC섬유박물관
[교실 밖 대구 역사체험] DTC섬유박물관

  DTC섬유박물관대구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전국 유일의 종합섬유박물관이다. DTC는 Daegu Textile Complex(대구 텍스타일 콤플렉스)를 줄인 말이다. 2015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은 섬유 및 패션에 관한 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각 층별 주요 시설은 1층 안내데스크/ 섬유창작소, 2층 패션관/ 기획전시실/ 어린이체험실, 3층 산업관/ 섬유기업실/ 섬유정보실, 4층 미래관/ 영상관/ 디자인 스튜디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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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와 대구의 첨단산업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대구의 첨단산업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 대구에서는 미래의 경제를 이끌어 갈 여러 첨단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그중 세 가지 분야를 살펴보자.   로봇산업도시 대구대구에는 현재 약 20개의 로봇 관련 기업들이 있고, 북구 제3산업단지에 가면 우리의 로봇산업 발전을 위해 설립된 한국로봇산업진흥원도 만날 수 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경북대학을 위시해 좋은 연구기관과 학교에서는 해마다 우수한 인력을 배출해 내고 있다. 로봇산업은 현재 대구시가 미래 신성장 산업으로 적극 육성하는 분야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2020년 7월 정부는 규제 제약을 받지 않고 신사업을 펼칠 규제자유특구 3차 지역으로 전국 7개 지역을 지정했는데, 대구는 ‘이동식 협동로봇’ 분야의 자유특구로 지정되었다.  첨단의료산업도시 대구대구시 동구 신서동에는 2013년 문을 연 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가 있다. 신약개발지원센터, 첨단의료기기개발지원센터, 실험동물센터, 의약생산센터를 갖춘 이곳에는 현재 90여 개 기업과 연구기관이 입주해 신약 개발, 첨단 의료기기 설계 등 의료 분야 연구와 기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입주기업 중에는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유망기업으로 선정된 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미래자동차산업도시 대구자동차부품산업은 섬유산업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구의 경제 성장을 이끈 핵심 분야였다. 대구의 산업공단 곳곳에는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많고, 그중에는 특정 부품에서 전국 1위인 기업도 있다. 현재 대구의 자동차부품 관련 기업들은 미래자동차 영역에서 전기차, 자율주행차, 튜닝카 분야에서의 성장에 힘쓰고 있다(튜닝자동차산업은 기존에 출시된 자동차의 외형을 바꾸거나 성능을 변화시키는 분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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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1위 농산물 대구 연근!
전국 1위 농산물 대구 연근!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땅속줄기를 연근이라 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많이 먹어 온 농산물인데, 시장이나 마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식감이 아삭아삭한 연근은 조림, 튀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할 수 있다.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다이어트에도 좋고, 차로 즐기는 사람도 많다. 대구를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대도시라고만 생각하다 보니 대구시 동구에 있는 연근(꽃)단지가 우리나라 최대의 연근 생산지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국 연근생산량의 약 40%가 대구 동구 연근(꽃)단지에서 나온다는 건 대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다. 연근(꽃)단지는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특히 여름철 드넓은 단지에 활짝 핀 연꽃들을 보며 따라 걸으면 바람결에 일렁이는 연꽃향에 취할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연꽃축제도 놓치면 아까운 볼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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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끈 대구의 섬유산업
대한민국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끈 대구의 섬유산업

   섬유 명산지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북도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면화, 모시, 마를 재배하기에 적당한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베 짜기가 성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안동지방에서 생산된 삼베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또 현대에 들어선 영주의 풍기 지방에서 생산되는 인견이 무척 유명하다. 1917년1917년, 일본인이 세운 공장이 대부분이던 대구에 최초로 조선 사람이 세운 섬유공장이 생겼다. 추인호라는 기업가가 세운 동양염직소였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동양염직소가 있는 달성동지역에는 섬유공장이 하나둘 늘어났다. 주변엔 공장에서 만든 옷감을 거래하는 포목점들도 생겼고, 대구에서 생산된 섬유를 구하려고 타지에서 오는이들의 발길이 자연스레 늘어났다. 제일모직 & 한국나이롱1941년 대구에 큰 섬유공장인 조선방직 대구메리야스공장이 생겼다. 메리야스란 면사나 모사(털실)로 만든 속옷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1950~1953년 한국전쟁 기간 동안 대구의 섬유공장들은 전쟁 피해를 별로 보지 않아서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55년 대구 침산동에 제일모직이, 1958년 신천동에 한국나이롱(오늘날의 코오롱) 공장이 들어서면서 대구의 섬유산업은 더욱 발전했다. 특히 한국나이롱에서는 국내 최초로 나일론 원사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것은 합성섬유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0년대를 지나며 대구의 섬유산업은 대구 경제는 물론 한국 경제를 이끄는 중요 산업이 되었다. 70%대구 섬유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대구최대의 시장이던 서문시장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전국 최대 섬유도매시장으로 성장하였다. 전체 점포 중 약 40%가 원단, 메리야스, 양말, 의류, 타월, 봉제 관련 제품을 취급했고, 전국 각지에서 대구의 섬유 제품을 구입하려는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한때 서문시장 섬유 거래량은 전국 거래량의70%를 차지할 정도였다. 오늘날 서문시장에 들어선 약 4000여개의 점포 가운데에는 여전히 섬유 및 의류 관련 상점이 가장 많으며, 시장 근처에는 대구의 섬유산업과 역사를 함께한 양말골목, 타월골목, 미싱골목이 남아 있다. 15층1970년대에 대구 시내에는 10층 이상 건물이 거의 없었다. 1978년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 무려 15층의 건물이 들어섰다. 대구 섬유산업 발전을 위해 세워진 섬유회관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몇 년 동안 대구에서 가장 높은 건물 자리를 지켰고 대구의 랜드마크(국가나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이나 건축물)가 되었다.  11월 11일11월 11일 그러면 빼빼로데이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나라에서 지정한 섬유의 날이기도 하다. 이 날이 섬유의 날로 지정된것은 1987년 11월 11일 단일 산업에서는 처음으로 섬유산업이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구는 섬유산업의 도시답게 이보다 16년 앞서 자체적으로 섬유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였다. 1971년 4월 17일 대구상공회의소가 제1회 대구 섬유의 날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또 1985년부터 대구섬유축제가 열렸고,​ 1999년 대구시는 섬유패션도시 선포식을 가졌다.​ since 2002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수출에서 섬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낮아졌다. 전기・전자산업과 중화학공업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그럼에도 섬유산업은 여전히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산업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구도 여전히 국내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중이다. 대구에선 2002년부터 매년 대구국제섬유박람회가 열리고있다. 또 전국 유일의 종합섬유박물관(DTC섬유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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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대, 세계 3대 안경산업도시 대구
한국 최대, 세계 3대 안경산업도시 대구

“안경 하면 대구지요!” 대한민국 사람이 모두 인정할 만큼 대구는 대한민국 최대 안경산업도시다. 대구시 북구에 있는 3산업단지에는 안경 완제품과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500곳 넘게 있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안경테는 전국 생산량의 약 85%를 차지하고 있다. 대구는 또 이탈리아 벨루노, 중국 윈저우와 함께 세계 3대 안경 생산지 중 하나이다. 대구의 안경산업이 순조롭게 넘버 원이 된 것은 아니다. 대구 안경산업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는데, 1990년대 들어 국내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신소재 안경테 개발 등 기술연구를 꾸준히 하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 나가, 2000년대 들어 제2의 도약을 하게 되었다. 안경 공장이 많은 대구시 북구 노원동과 침산동 지역은 안경산업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안경산업특구에는 안경거리가 있다. 약 1km 길이의 안경거리에 가면 안경 모양 가로등, 대형 안경으로 장식한 버스 정류장, 안경 장식 보도블록 등 이색 풍경들을 볼수 있다.   안경산업의 도시 대구에선 2001년부터 해마다 국제안경전이 열리고 있다. 2019년 EXCO(대구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18회 행사에는 국내외 210개사가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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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도 대구가 최초!
이것들도 대구가 최초!

대구의 역사, 대구 시민의 생활사를 이리저리 살펴보면 크든 작든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꽤 있다.그중 몇 가지 특기할 만한 것들을 추려 보자.  해방 이후 한국문학 최초의 시 동인지 『죽순』시 동인지란 시인들이 창작 모임을 만들어 함께 펴낸 시집을 말한다. 한국 현대문학사 최초의 시 동인지가 1946년 5월 대구에서 창간되었다. 시인 이윤수가 자신의 돈을 들여서 만든 이 동인지의 이름은 『죽순』이었다. 대나무의 땅속줄기에서 돋아나는 싹인 죽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죽순』은 창간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12호(임시 증간호 포함)가 발간되었는데, 박목월 등 훗날 한국문학을 빛내는 시인들의 작품이 많이 실렸다. 1979년 30년 만에 복간된 『죽순』은 현재까지 꾸준히 명맥을 잇고 있다. 최초의 지방은행 대구은행1967년 전까지 지방도시에 있는 은행들은 서울에 본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대구 지역의 경제인들은 몇 년 동안 대구에 본점을 둔 은행을 설립하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1967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 1개 도마다 1개의 지방은행을 신설하겠다는 정책을 결정했고, 준비를 착실히 한 대구에선 한국 최초의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이 문을 열었다. 50년을 훌쩍 넘긴 대구은행의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시민 프로축구단 대구FC2002년 한국은 일본과 FIFA 한・일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다. 대구에서도 몇 개의 시합이 열렸다. 전국에 울린 응원의 함성은 한국 팀이 4강에 오르는 좋은 성적과 함께 한국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2001년부터 추진된 대구 연고 축구단의 창단도 더욱 탄력을 받았다. 2001년부터 대구에선 대구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축구팀 창단이 추진되었는데, 2002년 시민주 공모를 통해 창단을 본격화하여 2002년 12월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창단이 승인되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최초로 시민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프로축구팀 대구FC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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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시철도 3호선에 타신 것을 환영합니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에 타신 것을 환영합니다!

 대구를 처음 찾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끄는 명물이 있다. 방문객들이 핸드폰을 꺼내어 촬영하느라 바쁘게 만드는 이것은 21세기 대구의 새로운 명물이 된 도시철도 3호선이다. 3호선에는 언제나 ‘한국 최초’와 ‘국내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모노레일(한 줄 레일 위를 달리는 철도) 방식으로 달리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대중교통 수단이다. 지상 평균 14m 높이에서 달리는 탓에 대구도시철도 3호선은 2015년 4월 23일 개통 하자마자 ‘하늘열차(Sky Rail)’라는 별명을 얻었다. 3호선은 평균 시속 38km로 칠곡경대 병원역부터 용지역까지 30개 역을 약 48분 만에 이동한다. 3호선은 북구 칠곡~수성구 범물 사이를 자동차로 이동할 때보다 소요시간을 26분 정도 단축시켰다. 도시철도 3호선은 대구 시민이 함께 만들어 낸 자랑거리다. 개통까지 준비 3년, 건설공사 5년, 시험운행 1년이 걸렸다. 이 긴 시간 동안 시민들은 건설공사에 따른 이런저런 불편을 인내했다. 그 결과 하늘열차는 편리한 대중교통 수단뿐만 아니라 대구의 자랑, 대구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큰 차창 덕에 창밖 도시 풍경을 널찍하게 감상할 수 있는 데다 노란빛을 띤 외관도 아담하고 귀여운 매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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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만날 수 있는 대한민국 제1호 천연기념물은?
대구에서 만날 수 있는 대한민국 제1호 천연기념물은?

 우리나라에는 460개가 넘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이 있다. 천연기념물이란 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 포함), 식물(자생지 포함), 지질·광물 중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을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천연기념물제도를 처음 실시한 것은 1962년이었다. 이때 대구에 있는 자연유산이 대한민국 제1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대구시 동구 산 180번지에 위치한 측백나무 숲. 원래 측백나무는 절벽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구의 천연기념물 제1호 측백나무들도 마찬가지여서 높이 5~7m인 측백나무 700여 그루가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지만 희귀하게도 한국에 서식하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처럼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재에는 천연기념물 외에 국보, 보물 등이 있다. 대구에도 많은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있으니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문화재 검색 → 문화재 지역별 검색’을 클릭하면 나타나는 지도에서 대구광역시를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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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의 보물 지정 담장,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라!
한국 유일의 보물 지정 담장,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라!

대한민국 지정 문화재 중에서 국보 제1호는? 서울에 있는 숭례문이다. 그럼 보물 제1호는? 역시 서울에 있는 흥인지문이다.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쌌던 성의 남쪽 대문이었고, 흥인지문은 동쪽 대문이었다. 한국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중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된 담장이 대구에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서원의 담장인데, 보물 제350호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훌륭한 학자를 기념하는 동시에 유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다. 도동서원은 1568년 조선의 유명 유학자인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607년 선조 임금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려 주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가 오랜 도동서원은 건물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부는 1963년 서원에 있는 중정당(강당 역할을 하던 건물)·사당·담장 세 개를 묶어 대한민국 보물 제 350호로 지정하였다. 서원 내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담장이 보물에 포함된 것은 도동서원 담장이 유일하다. 담장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형태와 구성이 독특하고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이 담장은 막돌을 쌓아 올린 위에 황토와 기와를 한 켜씩 번갈아 쌓고, 다시 아래위로 수막새로 무늬를 넣어 소박하면서도 장식적 효과를 최대한 살렸다. 지형에 따른 담장의 꺾임새와 높낮이의 변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리듬감 또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유네스코는 UN 산하 기관으로 교육· 과학· 문화 분야 일을 하는 국제기구다.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 유네스코(UNESCO)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유산의 종류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함께 담고 있는 유산), 인류무형유산, 기록유산이 있다. 세계유산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인류가 길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걸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에는 많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 있다. 이중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것은 14개로 서원이 여기에 속한다. 서원은 현재 전국에 600개가 넘게 남아 있으며, 2019년 유네스코는 이 가운데 아홉 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도동서원을 비롯해 소수서원(영주),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안동) 등 대구・경북에서만 5개 서원이 지정됐다. 9개 서원 중 광역시 단위의 큰 도시에 있는 것은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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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상북도는~요
우리 경상북도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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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상북도를 인재의 고장이라 하였을까?
왜 경상북도를 인재의 고장이라 하였을까?

 1751년 조선의 선비인 이중환은 조선 땅 곳곳을 답사한 후 지리책인 『택리지』를 썼다. 『택리지』 경상도 편에는 경상도의 역사와 여러 지방 지리 정보가 실려 있는데, 경상도를 소개하는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경상도에서 장군, 재상, 훌륭한 선비, 공을 세웠거나 절개를 지킨 사람, 불도 등에 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경상도를 인재의 곳간이라 한다.” 경상도가 배출한 인재의 역사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신라 사람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 시절에 이미 명성을 얻은 인재였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왕조가 들어선 후 많은 경주 출신 인재들이 고려 조정에서 활약했다. 고려 중엽 이후에는 유학자 안향, 역사서를 편찬한 김부식과 일연, 정치 지도자인 정몽주,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같은 역사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에서 빼어난 유학자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유명한 사람이 이황이었다. 이황을 배출한 안동 그리고 선산, 영주 같은 지방은 조선시대에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또 조선시대에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에 오른 사람이 무척 많았다. 종교 지도자도 많이 배출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 조선시대 말기 만민평등사상을 주창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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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도청이 있는 곳! 여기는 안동입니다
경상북도 도청이 있는 곳! 여기는 안동입니다

 2016년까지 대구시에 있던 경상북도 도청 건물은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인 안동시 풍천면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도청이 위치한 이 지역을 흔히 도청신도시라고 부른다. 2020년 7월 기준으로 도청신도시의 인구는 2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다.경상북도 도청을 품은 안동 지역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달구화현이 대구로 이름이 바뀐 757년에 안동 지역 이름도 고타야군에서 고창군으로 바뀌었다.안동이란 지명은 930년에 생겼다. 이 해에 고창에선 왕건의 고려군과 견훤의 후백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고창군의 지도자들은 왕건의 편에 서서 고려가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왕건은 고창군 사람들이 도와준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지역 이름을 고창에서 안동으로 바꾸었다. 여기엔 ‘평안한 동쪽 땅’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려·조선시대에 각 지방은 그 지방의 인구, 논과 밭의 면적 등을 기준으로 부·대도 호부·목·도호부·군·현으로 등급이 나눠졌다. 고려 말기인 1204년 안동은 대도호부가 되었다.조선시대에도 안동은 경상도의 중심지역으로서 읍격을 유지하였고, 세조 때는 잠시진(군대 거점 지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 때 안동에는 관찰부가 설치되어 경상도 동북부 17개 군을 관할하였다.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안동관찰부는 안동군이 되어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1931년 일부 면이 통폐합되면서 안동은 1읍 15개 면 218개 동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되었는데, 점차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1963년에 안동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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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지명에 들어있는 두 도시 이름은?
경상북도 지명에 들어있는 두 도시 이름은?

 경상도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합쳐서 부르는 지명이다.대구라는 지명이 처음 생겨난 신라 경덕왕 시절에 신라 땅에는 9주 5소경이 있었다. 오늘날 경상도 땅은 9주 중에서 상주, 양주, 강주의 3개 주에 걸쳐 있었다. 이때까지는 경상도라는 지명 이 없었다.995년 고려의 왕 성종은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다. 이때 경상도 지역은 영남도, 영동도, 산남도로 나눠지게 되었다. 처음 ‘경상’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1106년으로, 위의 3개 도를 합하여 경상진주도라고 불렀다. 이후 지명이 몇 번 바뀌었다가 1314년부터 경상도라는 지명이 굳어졌다.경상도는 지역의 대표적 큰 도시였던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지명이었다. 이런 지명 만들기는 조선 8도의 다른 지역에도 적용되었다. 전라도는 전주+나주를 합한 지명이었다. 이 외에 충청도(충주+청주), 강원도(강릉+원주), 황해도(황주+해주), 평안도(평양+안주), 함경도(함흥+경성)가 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명이다.경상북도가 생긴 것은 1896년 조선 정부가 전국을 8개 도에서 13개의 도로 나눴을 때였다. 이때 경상도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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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대구읍성 성돌이 남아있는 곳
[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대구읍성 성돌이 남아있는 곳

대구읍성 성돌이 남아있는 곳1907년 대구읍성이 철거된 뒤 성돌(성을 이룬 돌) 중 일부는 당시 대구에 세워지던 서양식 건물의 기초석이나, 부잣집 정원을 장식하는 용도로 팔려나갔다. 그 성돌 중 일부는 현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 안에 있는 선교사 주택 단지 안 스위츠 주택, 서문시장 옆에 있는 옛 계성학교 건물 중 하나인 아담스관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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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대구읍선 조형물
[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대구읍선 조형물

대구읍성 조형물대구시 중구 성내 1동에 설치되어 있다. 조형물에 있는 동판에는 읍성과 관련된 설명문, 지도 등이 새겨져 있어 대구읍성의 역사와 당시 대구 시가지의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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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영남제일관
[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대구읍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그중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불렀다. 일본이 1906년 허문 것을 1980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망우공원 안에 다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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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달성공원 관풍루
[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달성공원 관풍루

달성공원 관풍루1601년 경상감영 설치 때 선화당의 남서쪽에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올린 누각이 관풍루이다. 대구읍성을 철거한 후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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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경상감영공원
[교실 밖 대구 역사 체험] 경상감영공원

경상감영공원대구 도심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에는 선화당(관찰사 근무 장소)과 징청각(관찰사 거처)이 있다. 선화당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징청각은 제2호이다. 또 공원 안에는 관찰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말에서 내려 선화당으로 들어가야 했던 시설인 하마비, 관찰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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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구는~요
우리 대구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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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 대구시 → 대구직할시를 거쳐 지금은 대구광역시!
대구부→ 대구시 → 대구직할시를 거쳐 지금은 대구광역시!

 1895년까지 대구의 정식 명칭은 대구도호부였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 대구 지명은 여러 번 바뀌었다. 대구도호부 → 대구부(1895년) → 경상북도 대구군(1896년) → 대구부(1910년)로 바뀐 것이다.대구가 ‘시’로 승격한 것은 것은 1949년 8월 15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대구는 경상북도에 속한 도시였다. 대구는 경상북도 제1의 도시였고, 경상북도 도청도 대구에 있었다. 1958년 동촌, 공산, 가창, 성서, 월배면이 대구시로 편입되어 대구의 면적은 넓어졌다.1960~1970년대에 대구는 대도시로 빠르게 성장했다. 1969년 인구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같은 해 동대구역이 생겼다. 1970년엔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대구의 교통이 더 편리해졌다.대구시가 경상북도에서 분리가 된 것은 1981년이었다. 대구의 도시 규모가 커지자 부산에 이어 대한민국 도시 중 두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된 것이다. 대구직할시의 시대인 1984년 대구의 인구는 200만 명을 돌파하였다.1995년에 대구직할시는 대구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달성군 지역이 대구시로 편입이 되었다. 농지와 산이 많은 달성군이 대구시 지역이 됨으로써 대구의 면적은 크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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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구
1950년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에 쳐들어 온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데 이어 빠르게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을 떠나 후퇴하던 우리 정부는 1950년 7월 16일부터 대구를 대한민국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그해 8월 17일까지 한 달가량 대구는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8월 중순 북한군은 대구에서 가까운 왜관 지역까지 내 려왔다. 대구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밀리기만 하던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일대의 방어선을 잘 지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덕분에 대구는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대구의 공업은 빠르게 발전할 기회를 잡았다. 전쟁으로 다른 지역 공장들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대구의 공장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까닭이다.전통적으로 상업이 발전한 도시였던 대구에서 공업이 빠르게 발전하였다. 1950년대를 지나며 대구는 전국 제1의 섬유산업도시가 되었고, 서울, 부산에 이어 전국 3대 도시가 되었다.대구가 제3의 도시가 된 데는 행정중심도시, 상업과 공업의 발달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교육도시, 문화도시로도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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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기록한 대구읍성 풍경
외국인이 기록한 대구읍성 풍경

 1888년 프랑스 탐험가인 샤를 바라(Charles Varat)는 조선을 여행한 후 『조선기행』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엔 그가 대구읍성을 방문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말에 올라 대구 시내를 관람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높은 성벽을 구경시키려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둥근 길을 따라 쌓여진 그 성벽은 북경(중국 청나라 수도)의 성벽을축소한 것과 똑같다. 북경에서처럼 그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다. 사방 성벽의 각 면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그 성문에 있는 정자 안에 들어가면 과거 역사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들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서 나는 가을 햇빛 아래 찬란한 색채를 발하며 전원 사이를 굽이치는 금호강의 낙조를 감상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기념물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으나, 양반들이 사는 도시의 중심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서 있었다. 꼭대기와 가장자리가 교묘하게 굽어진 지붕의 기와들은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울려 절묘한 선의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같은 양식으로 된 절 두 채와 한문을 가르치는 큰 학교와 관청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조선기행』, 샤를 바라 외 지음, 성기수 옮김, 눈빛, 200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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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선 침략과 무너진 대구읍성
일본의 조선 침략과 무너진 대구읍성

 19세기 후반 조선의 힘이 약해지자 일본과 서양 강대국이 조선 땅에 밀려들었다. 경상감영의 도시 대구에도 변화가 생겼다. 1893년 대구읍성 남문 부근에 의약품과 잡화를 파는 일본인 가게가 생겼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에 조선땅에 들어온 일본군은 대구 달성(지금의 달성공원)에 부대를 주둔시켰다.1895년 조선초기부터 대구의 행정 명칭이었던 대구도호부가 대구부로, 1896년엔 대구군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904년 경부철도 건설공사가 시작된 후, 대구에는 건설 관계자와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 등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대구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군을 등에 업고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인들은 대구읍성 북문 밖에 많이 살았는데, 경부철도가 정차하는 대구역이 그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대구의 상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거주공간을 더 확보하려고 대구읍성 철거를 추진했다. 1906년 당시 대구군 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은 조선정부의 허가도 받지않고 일본인 요구대로 성벽 철거를 시작하였고, 1907년 읍성 철거를 완료하였다.성벽 철거 후 사방에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 무렵 경상감영 내의 여러 건물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일본이 세운 경찰서, 은행 등의 건물이들어섰다. 대구의 경상감영 자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 거점으로 탈바꿈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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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둘러쌌던 성이여! 상상만 하여도 웅장하구나!
대구를 둘러쌌던 성이여! 상상만 하여도 웅장하구나!

 1601년 경상감영이 들어선 곳은 오늘날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경상감영공원 자리였다. 관찰사 부임 후 대구는 경상도의 정치, 행정, 군사 분야 중심도시가 되었다.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 인근의 경산현・ 하양현・ 화원현 등이 대구도호부에 편입이 되었다. 이로 써 대구 면적은 더 넓어졌다. 인구도 더 늘어났다.감영 설치 후 대구에선 상업이 빠르게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대구는 낙동강 중류와 금호강 합류 지점에 위치해서 경상도 물산들이 집결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감영 설치 후 대구에는 큰 시장이 생겼다. 1658년 문을 연 약령시(약재를 거래하는 시장)였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 8도에서 가장 큰 약령시로 성장하였다.1736년 대구는 더욱 근사한 도시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의 지휘로감영을 중심으로 하여 대구 도심을 둘러싼 대구읍성을 건설한 것이다. 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을 가리킨다. 읍(邑)이라는 한자 자체도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을 나타낸 것이다. 대구읍성 규모는 둘레 약 2,650m, 성곽의 폭 약 8.7m, 높이는 약 3.5m였다. 상상만 하여도 웅장하지 않은가!대구읍성이 세워지고 60년 뒤 오늘날 경기도 수원에는 수원화성이 건설되었다. 수원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읍성이 잘 보존되었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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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경상감영을 설치하노라!
대구에 경상감영을 설치하노라!

1392년 고려에 이어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섰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와 교통의 요지였던 대구는 조선시대 들어 조금씩 그 규모가 커졌다. 도시는 더 넓어지고 인구도 더 늘어났다.세종대왕이 조선 제4대 왕으로 즉위했던 1419년 대구현은 대구군으로 승격이 되었다. 이어 1466년 대구군은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도호부는 인구가 많고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설치한 행정기구였다. 조선 초기 도호부가 설치된 도시는 약 40곳이었다.이 무렵 오늘날 경상북도 지역에는 대구보다 큰 도시가 몇 있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교통이 발달한 상주 같은 도시였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 전쟁은 1598년까지 이어졌다. 전쟁 동안 대구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전쟁 초기 대구 지역은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의 이동, 보급 통로가 되었다. 또 조선이 반격을 시작했을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조선・ 명나라 연합군의 군사작전이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598년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군사, 행정 제도를 개편하였다. 그 조치 중 하나로, 1601년에 경상 감영을 대구로 이전하였다.  경상도 관찰사의 집무실로 쓰인 선화당. 20세기 초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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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승자는? 바로 나! 왕건!
최후의 승자는? 바로 나! 왕건!

 야구에서 가장 짜릿한 승부는 9회 말 투아웃 후의 역전승이다. 시합 때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 역사에서도 역전 승부는 많았다. 왕건과 견훤의 대결이 그랬다.927년 대구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때는 신라, 고려, 후백제가 있었던 후삼국시대였다. 고려의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고려, 후백제 군대가 격돌한 곳은 오늘날의 대구 팔공산 지역이었다. 두 나라 최고 지도자가 지휘하는 대군이 정면 격돌했으니, 이 전투의 승패가 얼마나 중요했겠는가.전투는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왕건은 부하 장수인 신숭겸, 김락 등이 결사적으로 후백제 군대에 맞서 싸우며 보호한 덕분에 살아서 고려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공산전투 후 한동안 후백제는 기세등등하였고, 고려는 약세를 보였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왕건이었다. 935년 신라를 병합하는 데 성공한 왕건은 936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지휘하던 후백제 군대를 일선군(오늘날 경북 구미 지역)에서 무찌르고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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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대구로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수도를 대구로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통일신라의 지방행정제도인 9주 5소경은 685년 제31대 신문왕 때 만든 것이었다. 신문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아들이다.689년 신문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신라의 발전을 위해 수도를 옮기고 싶소.”“옮기신다면 어디로?”“달구벌(대구)이 좋을 것 같소.” 신문왕이 대구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삼국시대에 수도 이전은 몇 번 있었다. 고구려는 수도를 졸본성 → 국내성 → 평양으로 옮겼다. 백제는 한성(서울) → 웅진(충청남도 공주) → 사비(충청남도 부여)로 옮겼다.신하들의 반대로 신문왕의 대구 천도(수도 이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만약 대구가 신라의 새 수도가 되었다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 대구는 통일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재를 가진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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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달벌, 달구화 … 대구의 옛 이름에 담긴 뜻은?
달구벌, 달벌, 달구화 … 대구의 옛 이름에 담긴 뜻은?

대구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후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문화가 점점 발전하였다. 그 영향으로 대구 등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지명이생겼다. 대구라는 지명이 생기기 전 대구의 옛 이름은 달구벌이었다. 달구벌 외에, 달벌, 달불성, 달구화 등으로 불렸다.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쓴 역사책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 이사금 15년(261)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달구벌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삼국시대에 달(達)은 ‘넓은 것’ 또는 ‘높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벌(伐)은 ‘평지・ 평야・ 언덕・ 촌락’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달구벌은 ‘큰 언덕・ 넓은 평야・ 넓은 촌락’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벌’ 자로 끝나는 신라시대 지명에는 서라벌(경북 경주), 사벌(경북 상주) 등도 있다. 대구(大丘)의 한자 대(大)는 ‘클 대’, 구(丘)는 ‘언덕 구’이다. 경덕왕 시대에 달구벌이 대구로 바뀐 것은 이름이 바뀐 것일 뿐, 그 안에 담긴 뜻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 경덕왕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대구라는 지명보다 달구벌이나 달구화라는 지명을 더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한자 사용이 늘어나면서 대구를 달구벌보다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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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57년, 우리들의 도시 대구 탄생!
서기 757년, 우리들의 도시 대구 탄생!

  대구의 정식 이름은? 대구광역시다. 대구에 사는 우리들은? 대구광역시의 시민이다. 대한민국에는 도시 이름 뒤에 ‘특별시’, ‘특별자치시’, ‘광역시’가 붙는 곳이 있다. 특별시는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 특별자치시는 세종, 광역시는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이렇게 여섯 곳이다. 이 6개 광역시는 저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대구 가 가장 먼저 생긴 지명이다. 2021년 기준으로 무려 1264년 전,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년(757) 때 생겼으니까. 당시 신라의 영토는 수도인 금성(지금의 경주)과 9주 5소경(9개의 지방, 5개의 큰 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9주에는 여러 고을이 있었는데 각 고을 이름 뒤엔 군 또는 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오늘날 대구 지역은 9개의 주 중에서 삽량주에 속했다. 삽량주에는 위화군이 있었는데, 위화군에 속한 4개의 현 중에 달구화현이 있었다. 경덕왕은 757년 9주 5소경의 지명을 포함하여 거기에 속한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때 위화군에 속한 현이었던 달구화현도 이름이 대구현으로 바뀌었다. 당시 대구현의 한자 표기는 ‘大丘’였다. 우리들의 도시 대구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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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 대구시 → 대구직할시를 거쳐 지금은 대구광역시!
대구부→ 대구시 → 대구직할시를 거쳐 지금은 대구광역시!

1895년까지 대구의 정식 명칭은 대구도호부였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 대구 지명은 여러 번 바뀌었다. 대구도호부 → 대구부(1895년) → 경상북도 대구군(1896년) → 대구부(1910년)로 바뀐 것이다. 대구가 ‘시’로 승격한 것은 것은 1949년 8월 15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대구는 경상북도에 속한 도시였다. 대구는 경상북도 제1의 도시였고, 경상북도 도청도 대구에 있었다. 1958년 동촌, 공산, 가창, 성서, 월배면이 대구시로 편입되어 대구의 면적은 넓어졌다. 1960~1970년대에 대구는 대도시로 빠르게 성장했다. 1969년 인구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같은 해 동대구역이 생겼다. 1970년엔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대구의 교통이 더 편리해졌다.대구시가 경상북도에서 분리가 된 것은 1981년이었다. 대구의 도시 규모가 커지자 부산에 이어 대한민국 도시 중 두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된 것이다. 대구직할시의 시대인 1984년 대구의 인구는 200만 명을 돌파하였다. 1995년에 대구직할시는 대구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달성군 지역이 대구시로 편입이 되었다. 농지와 산이 많은 달성군이 대구시 지역이 됨으로써 대구의 면적은 크게 늘어났다.대구의 가족이 된 수성구, 달서구, 달성군대구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부터 아주 오랫동안 대구의 중심은 현재의 대구시 중구 지역이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구는 중구에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80년 전까지 대구에는 5개의 구가 있었다.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였다. 인구와 면적이 늘어나면서 대구에는 새로운 구가 생겼다. 1980년에 수성구가 생겼고, 1988년 달서구가 새로 생겼다. 이어 1995년 달성군이 대구시의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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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어떻게 대한민국 3대 도시로 성장했을까?
대구는 어떻게 대한민국 3대 도시로 성장했을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에 쳐들어 온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데 이어 빠르게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을 떠나 후퇴하던 우리 정부는 1950년 7월 16일부터 대구를 대한민국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그해 8월 17일까지 한 달가량 대구는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8월 중순 북한군은 대구에서 가까운 왜관 지역까지 내려왔다. 대구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밀리기만 하던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일대의 방어선을 잘 지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덕분에 대구는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대구의 공업은 빠르게 발전할 기회를 잡았다. 전쟁으로 다른 지역 공장들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대구의 공장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까닭이다.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전한 도시였던 대구에서 공업이 빠르게 발전하였다. 1950년대를 지나며 대구는 전국 제1의 섬유산업도시가 되었고, 서울, 부산에 이어 전국 3대 도시가 되었다. 대구가 제3의 도시가 된 데는 행정중심도시, 상업과 공업의 발달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교육도시, 문화도시로도 발전하였기 때문이다.[사진 : 한국전쟁 중 대구역 앞의 풍경]전쟁 중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대구 1950년 대구로 피난 온 사람들 중에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1953년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상당수 문학가, 음악가, 미술가들이 대구에서 예술 활동을 하였다.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현재 대구 도심 동성로 입구에 있는 <CGV 대구한일> 자리엔 극장 겸 공연장이 있었는데, 이곳은 전쟁기간 중에 대한민국 국립극장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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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기록한 대구읍성 풍경
외국인이 기록한 대구읍성 풍경

1888년 프랑스 탐험가인 샤를 바라(Charles Varat)는 조선을 여행한 후 『조선기행』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엔 그가 대구읍성을 방문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말에 올라 대구 시내를 관람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높은 성벽을 구경시키려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둥근 길을 따라 쌓여진 그 성벽은 북경(중국 청나라 수도)의 성벽을 축소한 것과 똑같다. 북경에서처럼 그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다. 사방 성벽의 각 면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그 성문에 있는 정자 안에 들어가면 과거 역사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들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서 나는 가을 햇빛 아래 찬란한 색채를 발하며 전원 사이를 굽이치는 금호강의 낙조를 감상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기념물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으나, 양반들이 사는 도시의 중심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서 있었다. 꼭대기와 가장자리가 교묘하게 굽어진 지붕의 기와들은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울려 절묘한 선의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같은 양식으로 된 절 두 채와 한문을 가르치는 큰 학교와 관청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조선기행』, 샤를 바라 외 지음, 성기수 옮김, 눈빛, 200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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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선 침략과 무너진 대구읍성
일본의 조선 침략과 무너진 대구읍성

19세기 후반 조선의 힘이 약해지자 일본과 서양 강대국이 조선 땅에 밀려들었다. 경상감영의 도시 대구에도 변화가 생겼다. 1893년 대구읍성 남문 부근에 의약품과 잡화를 파는 일본인 가게가 생겼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에 조선 땅에 들어온 일본군은 대구 달성(지금의 달성공원)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1895년 조선초기부터 대구의 행정 명칭이었던 대구도호부가 대구부로, 1896년엔 대구군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04년 경부철도 건설공사가 시작된 후, 대구에는 건설 관계자와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 등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대구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군을 등에 업고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인들은 대구읍성 북문 밖에 많이 살았는데, 경부철도가 정차하는 대구역이 그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대구의 상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거주공간을 더 확보하려고 대구읍성 철거를 추진했다. 1906년 당시 대구군 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은 조선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일본인 요구대로 성벽 철거를 시작하였고, 1907년 읍성 철거를 완료하였다. 성벽 철거 후 사방에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 무렵 경상감영 내의 여러 건물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일본이 세운 경찰서, 은행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대구의 경상감영 자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 거점으로 탈바꿈되고 만 것이다.“허물지 마라!” 감영 건물 철거에 저항했던 대구 사람들 대구읍성 철거 후 일본은 경상감영 안에 있는 시설들을 많이 철거하였다. 그중 하나가 경상감영 객사(손님들이 묵던 숙소)였던 달성관이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달성관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 사람들은 달성관 앞으로 몰려가 밤을 새워 가며 항의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동원해 농성하던 사람들을 해산시킨 후 달성관을 허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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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도시가 된 까닭은?
조선시대에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도시가 된 까닭은?

1392년 고려에 이어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섰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와 교통의 요지였던 대구는 조선시대 들어 조금씩 그 규모가 커졌다. 도시는 더 넓어지고 인구도 더 늘어났다. 세종대왕이 조선 제4대 왕으로 즉위했던 1419년 대구현은 대구군으로 승격이 되었다. 이어 1466년 대구군은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도호부는 인구가 많고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설치한 행정기구였다. 조선 초기 도호부가 설치된 도시는 약 40곳이었다. 이 무렵 오늘날 경상북도 지역에는 대구보다 큰 도시가 몇 있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교통이 발달한 상주 같은 도시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 전쟁은 1598년까지 이어졌다.전쟁 동안 대구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전쟁 초기 대구 지역은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의 이동, 보급 통로가 되었다. 또 조선이 반격을 시작했을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군사작전이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598년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군사, 행정 제도를 개편하였다. 그 조치 중 하나로, 1601년에 경상감영을 대구로 이전하였다.​ [사진은 경상도 관찰사의 집무실로 쓰인 선화당. 20세기 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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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둘러쌌던 성이여! 상상만 하여도 웅장하구나!
대구를 둘러쌌던 성이여! 상상만 하여도 웅장하구나!

1601년 경상감영이 들어선 곳은 오늘날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경상감영공원 자리였다. 관찰사 부임 후 대구는 경상도의 정치, 행정, 군사 분야 중심도시가 되었다.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 인근의 경산현・하양현・화원현 등이 대구도호부에 편입이 되었다. 이로써 대구 면적은 더 넓어졌다. 인구도 더 늘어났다. 감영 설치 후 대구에선 상업이 빠르게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대구는 낙동강 중류와 금호강 합류 지점에 위치해서 경상도 물산들이 집결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감영 설치 후 대구에는 큰 시장이 생겼다. 1658년 문을 연 약령시(약재를 거래하는 시장)였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 8도에서 가장 큰 약령시로 성장하였다. 1736년 대구는 더욱 근사한 도시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의 지휘로 감영을 중심으로 하여 대구 도심을 둘러싼 대구읍성을 건설한 것이다. 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을 가리킨다. 읍(邑)이라는 한자 자체도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을 나타낸 것이다. 대구읍성 규모는 둘레 약 2,650m, 성곽의 폭 약 8.7m, 높이는 약 3.5m였다. 상상만 하여도 웅장하지 않은가! 대구읍성이 세워지고 60년 뒤 오늘날 경기도 수원에는 수원화성이 건설되었다. 수원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읍성이 잘 보존되었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대구읍성 4대문과 서문시장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에 동서남북으로 큰 출입문이 있었던 것처럼 대구읍성 동서남북에도 4개의 큰 문이 있었다.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 공북문이었다. 대구읍성이 건설된 후 읍성의 서문 근처에 큰 시장이 생겼다. 서문 앞에 있다 하여 이 시장을 서문시장이라고 불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문시장은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시장 중 하나가 되었을 만큼 번창하였다. 서문시장은 1920년대에 지금의 위치(대구시 중구 대신동)로 이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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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전설이 전해 오는 ‘반야월’과 ‘안심’
왕건의 전설이 전해 오는 ‘반야월’과 ‘안심’

대구지하철 1호선 역 중에는 반야월역과 안심역이 있다. 한자로 쓰면 반야월은 半夜月, 안심은 安心이다. 이 지명에는 왕건의 전설이 전해 온다. 반야월은 왕건이 견훤 군대에 쫓기다 밤하늘을 보니 반달이 떠 있어서 반야월이 되었다고 한다. 안심은 왕건이 견훤의 추적을 따돌린 후 마음을 놓았다(안심하였다)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현재 팔공산에는 왕건의 전설을 배경으로 조성된 ‘왕건길’, 그리고 왕건을 구한 장수인 신숭겸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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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견훤의 군사와 격돌해 크게 패한 공산전투가 벌어진 현장인 파군재삼거리
왕건이 견훤의 군사와 격돌해 크게 패한 공산전투가 벌어진 현장인 파군재삼거리

최후의 승자는? 바로 나! 왕건!야구에서 가장 짜릿한 승부는 9회 말 투아웃 후의 역전승이다. 시합 때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역사에서도 역전 승부는 많았다. 왕건과 견훤의 대결이 그랬다. 927년 대구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때는 신라, 고려, 후백제가 있었던 후삼국시대였다. 고려의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려, 후백제 군대가 격돌한 곳은 오늘날의 대구 팔공산 지역이었다. 두 나라 최고 지도자가 지휘하는 대군이 정면 격돌했으니, 이 전투의 승패가 얼마나 중요했겠는가.전투는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왕건은 부하 장수인 신숭겸, 김락 등이 결사적으로 후백제 군대에 맞서 싸우며 보호한 덕분에 살아서 고려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산전투 후 한동안 후백제는 기세등등하였고, 고려는 약세를 보였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왕건이었다. 935년 신라를 병합하는 데 성공한 왕건은 936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지휘하던 후백제 군대를 일선군(오늘날 경북 구미 지역)에서 무찌르고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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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대구로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수도를 대구로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통일신라의 지방행정제도인 9주 5소경은 685년 제31대 신문왕 때 만든 것이었다. 신문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아들이다. 689년 신문왕이 신하들에 게 말하였다. “신라의 발전을 위해 수도를 옮기고 싶소.” “옮기신다면 어디로?” “달구벌(대구)이 좋을 것 같소.” 신문왕이 대구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삼국시대에 수도 이전은 몇 번 있었다. 고구려는 수도를 졸본성 → 국내성 → 평양으로 옮겼다. 백제는 한성(서울) → 웅진(충청남도 공주) → 사비(충청남도 부여)로 옮겼다. 신하들의 반대로 신문왕의 대구 천도(수도 이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대구가 신라의 새 수도가 되었다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 대구는 통일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재를 가진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왜 신문왕은 수도를 옮기려 했을까?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첫째, 신라 수도 금성(경주)이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곳에 있어 삼국통일로 크게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는 데 불편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구는 동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있어, 통일신라를 다스리는 데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둘째, 대대로 금성에서 살아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옮기지 못했을까? 귀족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이전을 포기했던 것으로 보인다.신문왕의 수도 이전 계획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신문왕 시대에 대구는 수도 이전 후보지가 될 만큼 군사, 교통에서 중요한 도시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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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달벌, 달구화 … 대구의 옛 이름에 담긴 뜻은?
달구벌, 달벌, 달구화 … 대구의 옛 이름에 담긴 뜻은?

대구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후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문화가 점점 발전하였다. 그 영향으로 대구 등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지명이 생겼다.   대구라는 지명이 생기기 전 대구의 옛 이름은 달구벌이었다. 달구벌 외에, 달벌, 달불성, 달구화 등으로 불렸다.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쓴 역사책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 이사금 15년(261)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달구벌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삼국시대에 달(達)은 ‘넓은 것’ 또는 ‘높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벌(伐)은 ‘평지・평야・언덕・촌락’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달구벌은 ‘큰 언덕・넓은 평야・넓은 촌락’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벌’ 자로 끝나는 신라시대 지명에는 서라벌(경북 경주), 사벌(경북 상주) 등도 있다.대구(大丘)의 한자 대(大)는 ‘클 대’, 구(丘)는 ‘언덕 구’이다. 경덕왕 시대에 달구벌이 대구로 바뀐 것은 이름이 바뀐 것일 뿐, 그 안에 담긴 뜻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 경덕왕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대구라는 지명보다 달구벌이나 달구화라는 지명을 더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한자 사용이 늘어나면서 대구를 달구벌보다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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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명 오작비
무술명 오작비

1946년 임창순이라는 학자가 대구 시내를 걷다가 길가에 내놓은 길이 1m, 폭 70cm 의 돌을 발견했다. 돌에는 한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문 실력이 뛰어났던 임창순은 그 돌이 신라시대 것임을 알아냈다. 그는 돌이 놓여 있는 집의 주인을 설득하여 그 것을 대학으로 가져와 표면에 새겨진 글자를 전부 해석하였다.   비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글씨를 새긴 것으로, 글자는 크기와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글씨의 줄도 똑바르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고아한 멋이 있었다. 그것은 삼국시대 인 6세기 중엽 대구에서 저수지를 만든 과정을 밝힌 비석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학자 임창순은 잠시 대구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 보니 학교에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 곳곳을 뒤져 교내 수영 장 부근에 묻혀 있는 비석을 찾아냈다.  왜 비석이 사라진 것일까? 한국전쟁 때 이 학교에 미군이 잠시 주둔하였는데, 이 비석의 가치를 몰라보고 방치한 때문이었다.   비석은 신라의 국방정책 및 농업정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에 1969년 보물로 지정 되었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대구 무술명 오작비’이다. 보물 제516호로, 경북대학교박 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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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 석빙고
현풍 석빙고

문화재는 종류가 다양하다. 나라에서 정한 문화재에는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 념물,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다. 시나 도 같은 지자체가 정한 문화재에는 시도유형문화재, 시도무형문화재, 시도기념물, 시도민속문화재, 시도등 록문화재, 문화재자료가 있다.   대구시 수성구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은 3개의 국보를 소장하고 있다.  국보 제182호, 183호, 184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들이다. 이 3개의 국보는 경상북도 구미 지역의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었다. 대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다. 대구 비산동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칼과 칼집 등의 유물이다. 각각 국보 제137-1호, 국보 제137-2호로 지정된 이 문화재는 현재 서울의 사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대구에는 나라에서 지정한 보물들이 꽤 많이 있다. 대구의 7개 구 중에서 국가 지정 보물이 많이 있는 곳은 달서구와 동구이다. 이 중 동구에 문화재가 많은 이유는 그곳에 팔공산이 있고 팔공산 곳곳에 신라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 있는 문화재 중에선 특이한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에 있는 석빙고(보물 제673호)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인데, 현 풍의 석빙고는 조선시대인 173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구 역사를 연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 중 하나가 『대구읍지』이 다. 조선시대 후기 대구의 역사와 모습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5호인 이 책은 대구 시민들에게는 국보나 다름없는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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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대구에는 2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하나는 한국의 서원 9개에 포함되어 있는 도동서원이다. 또 하나는 세계기록유산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다.  세계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서적, 문서, 편지 같은 역사 기록을 세계유산으로 정하는 것인데, 2017년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애국운동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빌린 국채(나랏빚)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정부의 힘만으로는 일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웠다. 이대로 가면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07년 2월 대구에 있는 출판사인 광문사를 경영하던 김광제, 서상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국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서상돈이 이런 제안을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백성들이 돈을 모아서라도 국채를 갚아야 합니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했으면 합니다. 단연(담배를 끊는 것)해서 모은 돈으로 국 채 갚는 운동을 벌여 봅시다.” 이들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 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나랏돈으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이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제안하는 글을 실었다. 이들은 동시에 대구에서 담배 끊는 모 임인 단연회를 설립하여 모금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 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국채보상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서울에선 국채보상기성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곧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금에 참여했다. 상인, 노동자, 농민, 부녀자, 군인 등이 참여하는 범국민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당황한 일본은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국채보 상운동을 이끌던 대한매일신보사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8년 일본은 이 신문사 경영자가 모금액 가운데 일부를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거짓 죄를 만들어 구속하였다. 신문사 경영자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국채보상운동 열기는 가라앉고 말았다.   비록 바라던 목표를 다 이루진 못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랏 빚을 갚기 위해 벌인 자랑스러운 애국운동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는 이 위대한 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딘 명예로운 도시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선언문, 회의록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과 이 운동의 기록물들이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연대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세계적 모범 사례라고 판단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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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성돌이 남아있는 곳
대구읍성 성돌이 남아있는 곳

1907년 대구읍성이 철거된 뒤 성돌(성을 이룬 돌) 중 일부는 당시 대구에 세워지던 서양식 건물의 기초석이나, 부잣집 정원을 장식하는 용도로 팔려나 갔다. 그 성돌 중 일부는 현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 안에 있는 선교사 주택 단지안 스위츠 주택, 서문시장 옆에 있는 옛 계성학교 건물 중 하나인 아담 스관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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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

대구읍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그중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불렀다. 일본이 1906년 허문것 을 1980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망우공원 안에 다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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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관풍루
달성공원 관풍루

1601년 경상감영 설치 때 선화당의 남 서쪽에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올린 누각이 관풍루이다. 대구읍성을 철거한 후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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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공원
경상감영공원

대구 도심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에는 선화당(관찰사 근무 장소)과 징청각(관찰사 거처)이 있다. 선화당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징청각은 제2호이다. 또 공원 안에는 관찰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말에서 내려 선화당으 로 들어가야 했던 시설인 하마비, 관찰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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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민주운동기념탑
2・28민주운동기념탑

경북고등학교역사관 대구에는 2・28 민주운동을 기념하는 탑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61년 과거 명덕로터리에 세워졌고, 지금은 두류공원에 있는 기념탑이다. 이 외에도 경북고, 대구고, 상원고, 대구공고 에 2・28기념탑이 건립되어 있다. 한편 경북고등 학교역사관에서도 이 학교의 역사와 함께 2・28 민주운동 자료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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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육박물관
대구교육박물관

북구 산격동에 있는 대구교육박물관은 교육도시 대구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 다. 대구의 교육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하 는 곳으로 근대부터 현대까지 대구 교육의 발자 취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7개의 전시실과 5개의 체험실을 갖추고 있다. 교육전시관에 있 는 2·28전시관에 가면 2·28 결의문, 관련 신문 기사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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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1971년 안동에 있는 신라시대 절인 봉정사에 있는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에서 귀중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25년 극락전을 보수할 때 만들어진 문서였는데, 거기 엔 봉정사와 극락전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 왕 12년(672)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시대인 공민왕 12년(1363) 극락전을 중창(낡은 건물 을 고쳐 다시 지음)하였다는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극락전 건물이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세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극락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북도 영주에도 아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있다. 부석사에 있는 무량수전이다 (국보 제18호). 부석사는 봉정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의상대사가 왕의 명령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건연대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재 적 가치가 아주 크다.  특히 무량수전을 떠받치는 나무 기둥이 배흘림기둥인 것이 이색 적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3분의 1쯤 되는 부분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보 이게 한 것을 말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옆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감탄이 나온다! 눈앞에 산줄기가 시 원시원하게 뻗어있는 소백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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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기단부 석축
불국사 기단부 석축

경주에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먼저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인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땅 위에 건축으로 풀어 낸 절이라 할 수 있다.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만들고 여기에 전각과 탑을 세웠는데, 특히 자연석과 다듬은 돌 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축대는 우리 전통건축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영역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과 석가탑 등이 있는 구역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등이 있는 구역으로 나뉜다. 국보 제23호 청운교 와 백운교는 정교하고도 화려하며, 석가탑(국보 제21호)은 완벽한 균형미와 장중한 아 름다움을 지녔다. 또 다보탑(국보 제20호)은 나무를 조각하듯 돌을 화려하고도 세밀하 게 다듬은 솜씨가 걸출하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같은 해에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했는데, 그의 사후 혜공왕 10년 (774)에 완공되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석굴이다. 긴 네모꼴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 축 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 등 조각의 아름다움도 탁월하며, 시설 훼손을 막기 위한 공기순환장치 등 과학적인 설계도 빼어나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 되어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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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지구 안에 있는  신라 왕궁의 별궁이었던 동궁과 연못 월지
경주 월성지구 안에 있는 신라 왕궁의 별궁이었던 동궁과 연못 월지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 경주는 2000년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는 경사를 맞았다.  신라 천년(BC 57~AD 935)의 옛 수도로서 수많은 유적이 잘 보존 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불교미술이 빛나 는 남산지구, 옛 왕궁 터인 월성지구, 왕릉 분포 지역인 대릉원지구, 신라 최대 사찰 유적 지인 황룡사지구, 경주 방어용 산성이 자리한 산성지구, 이렇게 5개 지구로 구성된다.  이 안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국보, 보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월성지구와 대릉원지구를 사례로 문화재 분포를 살펴보자.  월성지구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전설이 전해 오는 계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인 첨성대, 통일신라시대에 월지 서쪽에 있던 궁궐 건물인 임해전 터 등이 있다.   대릉원지구 신라의 왕, 왕족, 귀족 계층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대릉원 안에는 황남대총, 천마총을 비롯한 23개의 고분이 있다. 이 지역 무덤의 발굴 조사에서 신라 문 화와 기술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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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라는 지명이 맨 처음 등장하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
대구’라는 지명이 맨 처음 등장하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

대구의 정식 이름은? 대구광역시다. 대구에 사는 우리들은? 대구광역시의 시민이다.   대한민국에는 도시 이름 뒤에 ‘특별시’, ‘특별자치시’, ‘광역시’가 붙는 곳이 있다. 특별 시는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 특별자치시는 세종, 광역시는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이렇게 여섯 곳이다. 이 6개 광역시는 저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대구가 가장 먼저 생긴 지명이다. 2021년 기준으로 무려 1264년 전,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년(757) 때 생겼 으니까.  당시 신라의 영토는 수도인 금성(지금의 경주)과 9주 5소경(9개의 지방, 5개의 큰 도 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9주에는 여러 고을이 있었는데 각 고을 이름 뒤엔 군 또는 현 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오늘날 대구 지역은 9개의 주 중에서 삽량주에 속했다. 삽량주에는 위화군이 있었는 데, 위화군에 속한 4개의 현 중에 달구화현이 있었다.   경덕왕은 757년 9주 5소경의 지명을 포함하여 거기에 속한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 으로 바꾸었다. 이때 위화군에 속한 현이었던 달구화현도 이름이 대구현으로 바뀌었 다. 당시 대구현의 한자 표기는 ‘大丘’였다.  우리들의 도시 대구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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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된 도동서원의 담장
보물로 지정된 도동서원의 담장

대한민국 지정 문화재 중에서 국보 제1호는? 서울에 있는 숭례문이다. 그럼 보물 제1 호는? 역시 서울에 있는 흥인지문이다.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쌌던 성의 남 쪽 대문이었고, 흥인지문은 동쪽 대문이었다.   한국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중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된 담장이 대구에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서원의 담장인데, 보물 제350호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훌륭한 학자를 기념하는 동시에 유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다.  도동서원은 1568년 조선의 유명 유학자인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 건되었다. 1607년 선조 임금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려 주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가 오랜 도동서원은 건물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부는 1963년 서원에 있는 중정당(강당 역할을 하던 건물)·사당·담장 세 개를 묶어 대한민국 보물 제 350호로 지정하였다. 서원 내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담장이 보물 에 포함된 것은 도동서원 담장이 유일하다.   담장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형태와 구성이 독특하고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이 담장은 막돌을 쌓아 올린 위에 황토와 기와를 한 켜씩 번갈아 쌓고, 다시 아래위로 수막새로 무늬를 넣어 소박하면서도 장식적 효과를 최대한 살렸다. 지형에 따른 담장의 꺾임새와 높낮이의 변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리듬감 또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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